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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수진 Oct 15. 2019

관객의 지적 해방을 위하여

자유로운 번역가로서 무용공연 보기

불 꺼진 제자리에 앉아 그저 지켜보기. 이는 공연장을 찾은 관객의 유일한 임무이자 목적이다. 살아 움직이며 연기하는 몸들 앞에 앉은 우리는 예술가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집중하며 그 의도에 따라 반응하고, 그(녀)가 만들어 놓은 장치들을 해석해내기 위해 애쓴다. 때로는 직접 무대 위에 올라가 작품에 참여함으로써 ‘행위하는’ 관객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예술가는 관객들이 어두운 객석에 가만히 앉아 무대 위의 스펙터클을 그저 ‘보기’만 하는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본인들이 마련해놓은 여러 장치들을 통해 이성적으로, 감성적으로, 또는 신체적으로 변화하기를 원한다. 최근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관객 참여형 공연”, 즉 관객이 무대 위에 올라 움직이고, 배우들과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하도록 하는 연출 역시 수동적인 관객을 능동적인 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한 대표적 전략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관객으로서 우리는 정말 수동적일까? 긴 러닝타임 동안 불 꺼진 좁고 불편한 객석에 꼼짝없이 앉아 오직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우리는 예술가에 의해 능동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대상인 걸까?

“관객 역시 학생이나 학자처럼 행위 한다. 관객은 관찰하고 선별하고 비교하고 해석한다. 관객은 자신이 본 것을 그가 다른 무대에서, 다른 장소에서 보았던 다른 많은 것들과 연결한다. 관객은 자기 앞에 있는 시의 요소들을 가지고 자기만의 시를 짓는다. (중략) 그리하여 관객은 거리를 둔 구경꾼인 동시에 자신에게 제시되는 스펙터클에 대한 능동적 해석가이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ére), 양창렬 옮김, 『해방된 관객』, 서울:현실문화, 2016, p.25)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는 ‘보기’를 둘러싸고 플라톤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왔던 고정관념들을 비판하며 관객의 지적해방을 논한 바 있다. 그는 ‘보기’를 ‘행위하기’와 대립되는 위치에 놓음으로써 제자리에 앉아 공연을 지켜보는 관객들을 수동성의 틀에 가두는 오랜 편견의 오류를 지적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일상에서 대상을 지켜볼 때 관찰하고, 이해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느낀 것을 다른 이에게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객으로서 무대를 바라보는 것 역시 그 자체로 능동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관객으로 하여금 비판적 사고를 강요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행위하게 할 필요 없이 그 자체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곧 랑시에르가 말하는 관객의 지적 해방을 위한 출발점이다.


관객이 지닌 힘은, 스스로 지각한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번역하며, 그것을 개별적 지적 모험과 연결하는 것이다. 공연예술 중에서도 특히 모호하고 어려운 장르로 인식되는 무용공연을 찾을 때 우리는 더더욱 안무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곤 한다. 몸짓의 의미, 여러 오브제들이 하는 역할, 안무 의도 등 예술가가 마련해놓은 장치들을 파악하고자 애쓰며 이것이 곧 바람직한 무용 공연 관람법이라 막연하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능동적인 번역가로서 개개인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관객은 스스로가 경험하는 미적·예술적 체험을 예술가의 의도의 연속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을 멈춰야 한다.

 

<카페 뮐러(Cafe Müller)>를 바라볼 때, 피나 바우쉬의 안무 의도나 연출적 전략, 미적·예술적 가치와 상관없이 내 의지대로 해석하는 모든 것들, 잊고 있던 나만의 기억과 그것이 되살리는 감정들. 비록 어둠 속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오직 무대만을 응시하고 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을 내 의지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관객이 지닌 고유의 자유이자 능력인 것이다.

(이 글은 문화월간지 쿨투라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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