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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동원 Apr 01. 2022

세 곡으로 본 장국영

부록 (1) 그의 19주기를 맞아

1. ‘MONICA’(1984)     


 레슬리 청(장국영)이 데뷔한 것은 1977년, 방송국 주최의 가요제 우승때문이었다. 아직 영어로 된 팝송만을 부르던 장발 미소년은 오랜 무명 기간을 보냈다. 그는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본인이 원하지 않더라도 출연했고, 가수로 다시 나서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광둥어 유행 가요의 흥행에 따라 냈던 “연인의 화살(情人箭)”(1979), “한 조각 치심(一片痴)”(1982) 모두 썩 좋지 않은 성적을 냈기 때문이었다. 가수로 데뷔했지만, 3류 배우로만 남게 될 것 같았다.     

1981년 영화 "실업생"에 출연한 레슬리 청

 그러나 1983년 야마구치 모모에의 ‘이별의 저편에서’를 번안한 ‘바람아 계속 불어다오(風繼續吹)’로 어느 정도 주목을 받으며 기회가 주어진다. 일본 번안곡을 바탕으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1983년 당시 칸토 팝은 두 명의 선두주자가 이끌고 있었다. 남자는 알란 탐, 여자는 아니타 무이(매염방). 레슬리 청은 최고의 남자 스타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며 이듬해 ‘Monica’를 내놓는다.     


 ‘Monica’는 그해 일본의 괴물 신인이라 불리던 키카와 코지의 데뷔곡 ‘Monica’를 번안한 것이었다. 키카와 코지는 운동선수 출신의 고등학생으로 다부진 체구에 운동신경을 바탕으로 한 묘기에 가까운 안무를 선보이며 일본 대중의 뇌리에 자신을 각인시켰다. 이 곡을 레슬리 청이 번안한다니, 대부분은 그가 소화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내용을 바꾸며 레슬리 청과 홍콩이 담기게 되었다. 먼저 가사 내용부터 바뀌었다. 키카와의 곡에서는 어느 여름 바닷가에서 만난 사랑의 짜릿함과 설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레슬리 청의 곡은 자신에게 사랑을 알려주고 떠난 사랑에게 고마워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현란한 발동작이 중심이 되며 끝에 백텀블링이 더해졌던 키카와의 안무는 떨림을 강조하였는데, 레슬리 청은 한들거리며 자유로운 트위스트를 보였다. 의상도 짝 달라붙는 밝은 양복에서 한들거리는 셔츠로 바뀌었다.

      

‘Monica’가 수록된 앨범 “LESLIE”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느린 발라드 위주였던 당시 칸토 팝 음악에 ‘Monica’라는 댄스곡은 혁명이었다. 곡, 안무, 가사, 의상, 레슬리 청의 외모까지 모든 것이 어우러져 홍콩이라는 도시의 젊음과 풍요, 자유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도시는 그와 그의 노래에 열광했다. 그 결과 이 곡이 수록된 앨범 “LESLIE”는 홍콩에서만 20만 장이 팔리는 기록을 올렸다. 그는 단숨에 알란 탐의 절대적 1등 자리를 뺏어버린다. 7년 만에 홍콩 젊음의 상징이 된 것이다.     


‘Monica’ 뮤직비디오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모니카

Thanks thanks thanks thanks Monica

누가 네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誰 能 代 替 你地位     

아 그때 너무 나 자신을 지키려고만 했었어

AH 想當初太自衛

아 진심을 거짓인 줄 알았어

AH 將真心當是偽

아 빛은 점점 사라져가...

AH 當光陰已漸逝     

이제 그 사랑이 귀하다는 걸 알겠는데 네겐 이미 다른 사람이 생겼구나

方知它珍貴 你已有依歸

너의 과분한 사랑을 저버렸지만, 이 아름다운 꿈은 영원히 가슴 깊은 곳에 담아둘게

負了你錯愛 此美夢永遠藏於心底     



2. ‘처음부터(由零開始)’(1989)     


 하나의 세계가 찢어지면 어떻게 될까. 갈등 외의 경우는 보통 존재하지 않는다. 알란 탐의 천하는 깨졌고, 당대의 홍콩 소녀팬들은 알란 탐과 레슬리 청으로 갈라져 버렸다. 어린 학생일수록 자유분방한 트위스트를 추는 레슬리 청을 선호했고, 알란 탐은 출중한 가창력을 바탕으로 기성세대에게서도 사랑받고 있었다. 두 스타의 팬들은 서로를 좋게 보지 않았다. 레슬리 청의 팬들은 알란 탐이 중년의 지지를 업고 매번 음악상을 석권한다며 불만을 표했고, 알란 탐의 팬들은 레슬리 청에게 남성적 매력이 없다며 조롱했다. 이에 홍콩의 가장 소란스러운 갈등이었다고 하는 ‘담장대전(譚張大戰)’이 시작된다.   

  

영화 “영웅본색(英雄本色)”의 레슬리 청

 1985년, 이 해 레슬리 청은 지난 해 ‘Monica’를 성공시켰듯, 키카와 코지의 ‘La Vie en Rose’를 번안하여 ‘자유로운 바람(不羈的風)’이라는 제목으로 곡을 발표한다. 이 곡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알란 탐의 팬들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레슬리 청에게 경계심을 품는다. 그러나 레슬리 청의 파죽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영화 배우로도 인기가 있었던 레슬리 청은 연일 모든 미디어를 도배했다. 1986년 개봉한 레슬리 청 주연의 영화 “영웅본색(英雄本色)”은 알란 탐 주연의 “용형호제(龍兄虎弟)”보다 큰 인기를 끌었는데, 여기에서 시작된 갈등은 음악 시상식으로도 이어졌다. 레슬리 청이 부른 “영웅본색” 주제곡 ‘그때의 마음(當年情)’과 “용형호제” 주제곡 ‘친구(朋友)’가 모두 홍콩의 연간 최고 인기곡 10곡을 뽑는 시상식인 “십대경가금곡”에 올랐다. 영화에서의 패배가 알란 탐 팬들의 배타적 감정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알란 탐의 극성 팬들은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드러냈다. 알란 탐의 앨범 판매량이 레슬리 청에 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알란 탐 팬들은 그의 앨범을 최대한 사들였다. 보관할 공간이 없자 길거리에 그의 앨범을 버리기도 했다. 음반점 사장들은 이러한 광기를 조장하여 자신들의 매상을 올리고자 했다. 음반 판매량 표를 조작하여 가게 앞에 걸어둔 것이다. 레슬리 청의 승승장구도 그들을 미치게 했다. 그가 주연으로 참여한 “영웅본색 2(英雄本色 2)”와 “천녀유혼(倩女幽魂)” 모두 큰 인기를 끌었다. 콘서트 티켓 판매량에서는 레슬리 청이 알란 탐을 이기기도 했다. 끝내 알란 탐 팬들은 “레슬리 청은 동성애자다”라는 루머를 퍼뜨렸다. 이에도 성이 차지 않은 어떤 극성 팬은 레슬리 청의 차에 “당신은 에이즈로 죽을 것”이라는 낙서를 해놓기도 했다.    

 

이별콘서트의 레슬리 청

 사태가 이에 이르자 두 가수는 극도의 피로감을 느낀다. 먼저 빠져나온 것은 알란 탐이었다. 1987년 “십대경가금곡”에서 알란 탐이 세 곡이나 수상하는 것으로 발표되자 알란 탐은 더 이상 어떠한 음악계의 상도 받지 않겠다고 밝힌다. 이는 레슬리 청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알란 탐 팬들의 광기 어린 공격은 사그라들었지만, 마음 속의 공허함은 오히려 깊어갔다. 댄스 음악을 개창하고 점차 작곡을 배우며 새로운 길을 모색한 그였지만, 그의 심리 상태는 음악계 생활에서 느끼는 허무를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결국 영화에 전념하겠다며 기나긴 이별 콘서트를 기획한다. 홍콩 외에도 대만,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투어를 진행한다. 그는 이 무대들에서 자신이 작곡한 곡, ‘처음부터(由零開始)’를 부른다. 자신이 돌아와도 사랑해주겠냐는 그의 노래 속 물음은 노래에 대한 여전한 사랑, 그럼에도 극복할 수 없던 그의 고통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그의 고통이 곡 곳곳에 짙게 스며 있다.     


이별콘서트에서 ‘처음부터’를 부르는 레슬리 청


나를 기억해 주겠어요? 어렵겠지만...

Will you remember me 就算是不得已

나를 사랑한다면 그대 나를 위해 기회를 한 번 줄 수 있겠어요?

如若愛我 盼妳可以給我試一次

훗날 우리 다시 만나도 여전히 지난날 설레게 하던 웃는 얼굴일 테죠

來日妳我再度相見 仍是舊日動人笑面

내게 뜨거운 눈빛을 한 번 보여줘요, 아니, 천 번씩요

給我熊熱眼光一遍 一千遍     




3. ‘유리의 사랑(玻璃之情)’(2003)     


 가수 은퇴 이후의 레슬리 청은 홍콩을 넘어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배우가 된다. 천카이거(陳凱歌) 감독과 함께한 “패왕별희(霸王別姬)”(1993)와 웡가와이(王家衛) 감독과 함께한 “동사서독(東邪西毒)”(1994)이었다. 레슬리 청은 이 외의 상업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며 홍콩 최고 인기 배우의 지위를 누린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음악도 찾았다. 영화 제작자들도 레슬리 청에게 음악인 역할을 제안하며 감미로운 발라드 주제곡을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 그 역시도 노래가 그리웠기에 영화마다 한 두 곡씩 자신의 노래를 넣게 되었다. 락 레코즈 사는 이러한 레슬리 청과 계약하고 영화에서 부른 곡들을 모아 1995년 앨범 “총애(寵愛)”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전 세계에서 20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한다. 홍콩에서 50만 장, 한국에서도 50만 장이 판매되었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판매된 불법 복제 앨범은 셀 수도 없다.     

영화 "금지옥엽(金枝玉葉)"(1994)의 레슬리 청. 이 영화에서 '이 삶, 이 세상(今生今世)' 등의 주제가를 불렀다.

 레슬리 청은 자신의 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확인하자 복귀했다. 비록 배우로 큰 성공을 이루었지만, 홍콩 대중 앞에서 가수로 인정받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꿈은 여전했다. 1996년, 복귀 앨범 “레드(紅)” 역시 뜨겁게 사랑받았다. 음악 방송의 순위에 오르지는 않지만, 12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한다. 그 이후에도 “요즘들어(這些年來)”(1998), “너와 함께 카운트다운(陪你倒數)”(1999), “뜨거워(大熱)”(2000) 등의 앨범을 발매하였는데, 모두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장국영은 2000년 동남아시아 투어에서 “나는 여러분 앞에서 노래하고, 함께하는 걸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사랑에 호응한다.     


 이 시기 레슬리 청 활동의 특징은 예술가의 경지를 추구했다는 것이었다. 작곡 실력은 나날이 원숙해져 여러 가수에게 곡을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프로듀서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웡이우멩(黃耀明, 황요명), 작사가 람젝(임석) 등과 교분을 맺어 함께 작업했다. 특히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선언과 같은 ‘나(我)’(2000)는 람젝 작사, 레슬리 청 작곡이 어우러진 작품 가운데 최고의 수작으로 손꼽힌다. 이외에도 EDM 비트가 들어간 음악에도 관심을 가져 아니타 무이(Anita Mui, 梅艶芳, 매염방)과 ‘아름다움의 끝(芳華絶代)’(2000)이라는 곡을 발표하며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했다. 영화 촬영에도 관심을 가져 공익 영화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동사서독(東邪西毒)”의 레슬리 청.

 그러나 그는 고독하고 슬펐다. 사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우울증을 오래 전부터 앓았다고 한다. 브리지트 린(Brigitte Lin, 林靑霞, 임청하)을 비롯한 소수의 지인만이 알았던 그의 고통. 그의 다양한 시도와 도전, 대중의 사랑에 대한 갈구는 그 우울과 좌절감을 넘어서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유작인 ‘유리의 사랑(玻璃之情)’에서는 그의 고통이 심하게 느껴진다. 람젝이 작사를, 레슬리 청이 작곡을 맡았던 이 곡은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유리처럼 불안한 마음을 노래한다. 이 곡에서 유리는 언젠가 깨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다. 그리고 깨진 유리는 다시 붙을 수 없다. 그런 극복할 수 없는 좌절감이 이 노래에 있다. 그의 삶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19년 전 오늘, 그는 세상을 떠났다.  



나의 이 고통스러운 마음은 이미 예정된 거였어

我這苦心 已有預備

언제든 유리 조각이 땅에 떨어져 깨질 수 있듯이

隨時有塊玻璃 破碎墜地

애써 계속한다면 말 한마디 때문에 널 미워하게 될 지도 몰라

勉強下去 我會憎你 只差那一口氣     

눈물 따위가 즐거움을 잃은 너를 계속 사랑하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아

不信眼淚能令失樂的你愛下去

다시 담기 어려운 저 엎어진 물이 감정을 점점 씻어나가

難收的復水 將感情慢慢盪開去

만약 네가 너무 지쳤다면, 그때 내게 이별을 고하더라도 잘못이 아니야

如果你太累 及時地道別沒有罪

손잡고 왔기만, 빈손으로 떠나는구나, 그저 떠나는구나

牽手來 空手去 就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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