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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쇄도전러 수찌 Jan 21. 2023

사우나 카르텔 입성기

연휴를 맞아 고향에 왔다. 우리 가족에게는 오랜 전통이 있다. 요즘 여러 이유로 공중목욕탕에 잘 가지 않지만, 설날을 앞두고는 꼭 목욕탕에 가야 했다. 매일 샤워를 하는 요즘 굳이 때를 밀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알고, 공중목욕탕의 위생이 그리 청결하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들지만. 오랜 습관 때문인지 설을 앞두면 어쩐지 목욕탕에 가야 할 것 같다. 집 떠나 타지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혼자 목욕탕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늘 엄마와 함께 왔던 목욕탕에 혼자 덜렁 들어가, 아줌마와 할머니들 틈바구니에 자리 잡기가 영 자신 없었다고 할까. 친하다고 말할 친구와도 알몸을 내어 보이며 때까지 벗겨야 하는 진짜 발가벗은 그 세계까지는 함께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세상 어디까지도 가는 딸이 서울살이하는 동안 목욕탕에는 잘 가지 않았다고 말하니, 엄마는 놀란 눈치다. ‘목욕탕은 엄마랑 오고 싶었다’고 한 마디를 넉살 섞어 건네니, 내일 당장 목욕탕부터 가자는 말이 돌아왔다. 집 떠나 저 혼자 잘 사는 척하는 딸이지만, 엄마는 아직 부모만이 딸에게 열어줄 수 있는 영역이 있음에 흡족한 눈치였다.     


한동안은 고향에 오면 유명하다는 온천에 가족끼리 함께 가곤 했다. 온천까지 가는 길에 나름의 드라이브가 가능하기도 했고, 늘 가던 동네 목욕탕과 달리 넓고 다양한 시설이 있어 좋았다. 이번에는 굳이 그 온천까지 가지도 말고, 그냥 집 앞 목욕탕을 가기로 했다. 엄마가 그간 여러 목욕탕을 다녀 본 결과, 이 사우나의 물이 가장 괜찮다고 했다. 물론 과학적 근거는 없다. 그저 ‘몸이 매끄러운 것 같다’는 경험적 결과이나, 잘 모르는 분야이므로 생활의 지혜를 따르기로 했다.     


목욕탕 시설은 옛 기억 그대로였다. 온탕에 몸을 담그고 엄마와 잠깐 이야기를 하는 중에, 어린이집을 다닐 법한 아이 하나와 할머니로 보이는 아줌마가 옆으로 들어와 앉았다. 자연스레 대화의 주제가 언젠가 올지도 모르는 가정의 영역으로 흘렀다.

“나중에 내 애기도 엄마가 봐줄 거야?”

“절대로. 맡길 생각도 하지 마라.”

그때, 마치 원래 우리와 함께 이야기 중이었던 것처럼 아이 할머니가 치고 들어왔다.

“아이고 말도 마이소. 절대 안됩니데이. 절대로 맡아주지 마이소.”

아들 내외가 맞벌이 중인데, 어린이집 역시 방학이라 서울에서 아들이 여기까지 내려와 아이를 맡겨두고 갔다고 한다. 요즘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가정의 모습이다. 맞벌이이나 코로나로 인해 어린이집은 자주 문을 닫아 뾰족한 도리가 없던 아이 엄마와 아빠는 지난 2년간 자주 할머니 댁에 아이를 맡겼다고 했다. 예전과 같았으면 관심도 없던 분야지만, 이제는 그저 남 일 같지는 않아 아이 할머니와 나, 엄마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다행히 무척 순하다는 아이는 수시로 온탕 밖을 드나들며 어른들의 대화 시간을 벌어주었다.     


온탕 반신욕을 마치고 이번에는 사우나로 향했다. 엄마는 요즘 습식 사우나에 빠졌다고 했다. 참을성 없는 내가 자꾸만 사우나 밖으로 뛰쳐나가려 하자 엄마가 그간 발견한 노하우를 알려줬다. 찬물을 한 바가지 떠와 옆에 두고 틈틈이 끼얹으면 더 오래 버틸 수 있댔다. 작은 바가지 가득 찬물을 떠와 조금씩 아껴가며 얼굴과 상체에 뿌리니 과연 그 말대로 좀 더 버틸 수 있긴 했다. 사우나는 젊은이가 혼자서 목욕탕에 온다면 더욱 적응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대부분의 목욕탕에는 ‘고인물 아주머니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들은 특히 사우나에서 그 존재감을 발휘한다. 적절한 온도의 방에서 냉커피와 과일을 함께 섭취하며 오래간 이야기를 나누는데, 종종 자리가 정해져 있다며 낯선 이가 그 자리에 앉는다면 비키라고 훈계도 한다. 그 세계의 규칙을 모르고 자리를 폈다가 괜히 한 소리를 들은 뒤, 내게 그 사우나 카르텔은 그리 좋은 이미지가 못 됐다.     


엄마와 내가 사우나를 오래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고 있으니, 만반의 장비를 갖춘 채 구석에서 찜질하던 한 아줌마가 또 자연스레 말을 걸어왔다. 자신은 이 사우나에 10년도 넘게 연간회원권을 끊어 다니는 중인 진짜배기 회원이므로 자신의 말을 믿어도 되며, 사우나는 ‘기세’가 중요하다고 했다. 조금 앉아있다가 씻고 한참 뒤에 또 들어오지 말고 한 번 할 때 쭉- 스트레이트로 찜질을 하는 버릇을 들여야 오래 버틸 수 있다고, 나름의 노하우를 말해줬다. 옆에 있는 아줌마도 맞장구를 치며 대화에 끼었다. 각종 방수 방석과 헤어밴드로 단단히 무장해서 내가 무서워하던 ‘사우나 카르텔 아줌마’ 같았는데.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엄마 같기도, 이모 같기도, 옆집 아줌마 같기도 했다.     


사우나 카르텔 아줌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식밖에 모르던 우리네 아줌마들. 자식이 모두 출가한 뒤, 그 허전함을 사우나 친목과 토크로 메우는 게 아닐까. 별다른 취미거리도 없이 평생을 가족에 헌신하던 아줌마들의 뒤늦은 취미라고 이해하니. 이 사우나 카르텔도 약간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달-목욕’ 혹은 ‘연-목욕권’이 아줌마들의 데일리 루틴에서 꽤 의미 있는 한 축을 담당하겠다고 생각하니 약간은 마음이 찡해왔다. 사우나 카르텔을 형성하고 낯선 이에게 무서운 눈초리를 뿌리던 아줌마 역시 사실은 제 친구의 영역을 지켜주려 하는 중이었을지도. 내가 먼저 살짝 말을 걸어봤다면 그저 평범한 우리네 엄마였을지도 모르겠다.     


세상 어디까지도 가면서 혼자 목욕탕 가기는 무섭던 3n살. 어쩐지 이번 목욕탕 방문에서는 아줌마들의 대화 소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저 무섭던 사우나 카르텔 아줌마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 역시 소중한 일상 루틴을 사수하려 노력하는 중이었다니. 이제는 사우나 카르텔을 만난다면 살가운 얼굴로 말을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서울에서도 나 홀로 목욕탕에 당당히 입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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