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에도 소생밸이 필요해
취미를 굳이 두 종류로 나누면 소비적인 타입과 생산적인 타입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에 따라 다르겠으나 내 기준, ‘소비적 취미’란 유튜브 보기, 드라마나 영화 보기, 잠자기, 멍 때리기 같이 특별한 결과가 남지 않는 취미를 말하고, ‘생산적 취미’란 뜨개질이나 글쓰기나 영상 제작과 같이 유무형의 결과물이 남는 시간을 말한다.
얼핏 들어보면 소비적인 취미는 비효율적인 시간 같고 생산적 취미가 더 좋아 보이지만. 한동안 생산적인 취미에 몰두한 나는 요즘 ‘일상 속 소비적 취미’의 중요성 역시 절감하는 중이다.
사실 요 몇 년간 나는 갖은 생산 활동에 열심이었다. 글을 쓰며 흙탕물같이 어지럽기만 하던 내면이 정돈되는 것을 느꼈다. 어떤 상담으로도 어떤 시도로도 이룰 수 없던 ‘내면의 안정’에 도달하고 나니 글쓰기가 더 좋아졌다. 취미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내 이름 석 자 단 책도 세상에 나오니 글쓰기란 더욱 내겐 특별한 취미가 됐다.
또 어차피 여행 가서 사진 찍는데, 요즘 대세라는 유튜브를 나도 한 번 해보자 싶어 영상에도 도전을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찍어온 영상을 붙여 업로드하는 수준이었지만, 점점 욕심이 생겼다. 어느 순간 편집이 하기 싫어 여행 가기를 망설이는 내가 보였다. 여행이 좋아 유튜브도 시작한 건데. 유튜브가 부담스러워지니 더 좋아하던 여행까지 주저하게 됐다.
과거 ‘극 P(즉흥 유형) 인간’이자 대한민국 대표 (자칭) 시간 살인자답게 시간을 죽이는 데에만 재능이 있던 나. 어찌하여 요즘에는 스스로를 정반대 방향으로 몰아붙이는 데만 몰두한 걸까. 참으로 중용이라는 건 모르는 극단적인 인간이다.
평생을 ‘시간 킬러’로 지내다, 생산적 취미에 빠지고 그놈의 ‘성과’가 발생하니 신이 났다. (자기 계발서에서 부르짖는 그 성과 말이다.) 무언가를 창작하기 위해서 머리를 뜯는 시간은 실로 힘들었지만, 결국 결과에 닿았을 때는 일론 머스크도 부럽지 않은 뿌듯한 기분이 됐다.
그 뿌듯함에 매료되었나 보다. 갖은 취미로 다양하게 보내던 주말이었지만, 요즘엔 주말이 되면 주로 카페나 도서관에 갔다. 창작이라는 영역은 끝이 없었다. 하나가 끝나면 다음 아이디어가 또 생각났다. 할 일 체크리스트를 지우고 지워도 썰물같이 할 거리는 또 쌓였다. 세상에는 재밌는 일이 많고 도전해 보고 싶은 프로젝트도 많기 때문이다.
어느 날 현타가 왔다. 요즘 내가 벌린 일들은 취미의 양을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산을 멈출 때가 온 것이다. 빼곡하게 할 일과 해냈음이 기록된 다이어리를 봤다. 어느새 6월이었다. 일 년 중 절반이 지나 여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음에, 이것만 마치고를 외치며 미뤄뒀던 소비적 취미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 오랫동안 나가지 못했던 한강 피크닉
- 3시간 동안 예쁘게 만들어 10분 컷으로 해치우는 맛있는 디저트
-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한 끼 말고 나를 위해 정성스레 차리는 저녁
- 생존을 위해 걸치고 나가는 출근용 옷차림 말고, 평소에 잘 입을 일 없지만 기분 좋은 옷차림
- 컨텐츠를 생산하지 않고 그냥 여행하기
- 책이나 영화의 효용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끌리면 아무거나 펼쳐보기
일에만 번아웃이 오는 줄 알았는데. 좋아서 하는 취미도 번아웃 비스무리한 감정이 생기기도 했다. 역시 인간은 생각보다 나약했고, 시간과 생산량을 스스로 주무를 수 있다는 건방진 생각은 하지 말아야 했다. 좋아서 했던 취미에 진심으로 번아웃이 오기 전에. 소비적 취미와 생산적 취미 둘 사이를 밀당하며, 나의 세계를 채워 나가는 수밖에. 인생에 워라밸이 필요하듯 치매도 소생밸이 필요했다.
모두가 본업으로 덕업일치를 이룰 수는 없기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취미로 산다’고 대답하고 싶은 나. 한때는 소모적 취미에 너무 빠져서, 요즘은 생산적 활동에 너무 빠져 지칠 뻔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이 두 취미는 똑같이 값지다는 것을. 둘 중에 어느 것도 잃지 않고 밀-당-밀-당하며 인생을 쌓아가야 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