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6일 오전 9시 40분, 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 새로운 나라 새로운 집 새로운 식탁에서
#1. 타히티에 왔다. 25일 밤에 도착했으니 딱 일주일을 보낸 셈이다. 타히티는 남태평양에 위치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라는 나라의 가장 큰 섬이다. 나는 타히티의 북서부 해안이자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수도인 파페에테에 살기 시작했다.
#2. 타히티에 가고 싶다는 마음은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안 순간부터 폭발하듯 생겨났다. 클린턴의 발령지에 대해 그간 숱하게 나눴던 대화에서 내가 계속해서 강조해 왔던 '내가 일할 수 있는, 즉 예술계가 활발한 도시여야 할 것'이라는 조건은 타히티라는 단어 앞에 무색하게 사라졌다. 일할 수 있건 없건,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진 섬나라의 아름다운 바다에서 그저 둥둥 떠다니고만 싶었다.
타히티행이 확정되었던 때는 작년 5월, 파리를 떠나 호주로 가는 와중이었다. 설레고 두근대고 조금은 떨리기도 했던 그 신나는 마음을 지난 열 달간 간직해 왔다. 그리고 드디어 타히티에 왔다.
#3. 그렇게 도착한 타히티는 예상대로 아름답다. 끝없이 펼쳐지는 태평양 바다와 가까이 보이는 무레아섬. 미소를 머금은 타히티의 사람들.
그런데 아직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여행으로라도 한 번도 와 본 적 없던 나라는 아무리 상상을 많이 하고 아무리 많은 여행 영상을 봤어도 낯설다. 사람들은 또다시 프랑스어로 말을 한다. 10달 새에 많이 까먹은 프랑스어는 이곳의 노래하는 듯한 억양이 합쳐져 알아듣기 어렵다. 대중교통이 거의 없다시피 해 슈퍼도 차로만 갈 수 있다. 작년 한국에서 미리 연수를 받았지만 장롱면허인 나로서는 모든 게 어렵고 무섭기만 하다. 매일매일 운전 연습을 해야 몇 달 후에는 혼자 슈퍼라도 가고 바다도 갈 수 있을 텐데, 여기서 차를 사는 것만 해도 한세월이 걸릴 것 같다. 결국 이번 주는 텅 빈 집에서 홀로 보냈다. 클린턴이 일을 갔다 오기 전까지 들리는 소리라고는 옆 집을 짓는 공사장 소음뿐이다.
외롭다. 모든 것에서 떨어져서 여유를 즐기고 싶었는데 누군가와 간절히 연결되고 싶다.
#4. 이런 내가 바보같이 느껴진다. 그토록 꿈꾸던 곳에 와놓고 즐기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내가 부럽다고 한다. 나였어도 그렇게 얘기했을 것 같다. 다른 곳도 아니고 타히티행은 내가 그토록 바랐던 것이니까. 한편으로는 아직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힘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익숙해지는 데는 언제나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은 의식적으로 할 뿐, 마음으로는 하루빨리 적응하고 혹은 빨리 적응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운전을 더 연습한다던가 프랑스어를 더 공부한다던가) 내가 못나게 느껴진다. 가슴이 답답하다. 초조하고 불안하다. 잠을 푹 자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나라 이동을 위해서 너무나도 바빴던 지난 몇 달, 특히 그동안 지켜왔던 나의 루틴들을 전혀 하지 못했던 지난 한 달간의 시간이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운이 나지 않아 해야 할 일들조차도 겨우겨우 쳐내고 있지만, 오늘은 그래도 스트레칭을 하고, 약간이라도 숨이 차는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해 보자고 생각한다. 이 중에서 단 하나라도, 단 1분이라도 하자고 그렇게 조금씩 회복하자고 다짐한다.
#5. 그래서 오늘은 책을 읽었다. 할 일을 끝의 끝까지 미뤄가며 핸드폰만을 들고 있었던 나는 폰 대신 책을 드는 일에 용기가 필요했다. 핸드폰을 봐봤자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아닌데, 왠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지 않으면 불안이 더 커져서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계속 의미도 없는 쇼츠를 넘겨봤다. 폰을 손에 쥐고 잠을 잤다.
핸드폰을 저 멀리 충전기에 꽂아놓고 한강의 "빛과 실"을 읽었다. 작년 9월 인천공항 입국장 근처 서점에서 샀던 책이다. 그 후로 계속 곁에 두고 중간중간 읽었었는데, 단문 모음집이라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서 읽은 적은 없었다. 펼쳐보지는 않았지만 캐리어에 넣어 가져온 두 권의 책 중 한 권이었다.
그렇게 오늘 아침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한 부분이 마음에 왔다.
"어쨌든 루틴이 돌아온다.
매일 시집과 소설을 한 권씩 읽는다. 문장들의 밀도로 다시 충전되려고.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과 걷기를 하루에 두 시간씩 한다, 다시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게."
#6. 행복해야 하는 데 행복하지 못한 내가 용서가 안 된다. 그런 나 자신에게 조금만 너그러워지자고 결심한다. 잃어버렸던 루틴들, 매일 일기와 다이어리를 쓰고 운동을 하고 차를 마시다 보면, 어느새 이 아름다운 풍경이 충만한 행복으로 돌아올 것이다. 새로운 곳에서 또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