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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카 Sukha Mar 28. 2021

바람 부는 날에 서서




그 무렵의 나는 변화를 좋아했다. 식당에 가면 무조건 새로운 메뉴를 시켰고, 카페에 가도 새로운 음료를 마셨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집에 가는 길도 둘러가며 새로운 루트를 찾는 모험을 떠나곤 했다. "넌 나중에 어떻게 살고 싶어?" 친구의 질문 "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살고 싶어." 대답한 건 툭 튀어나온 진심이었다.



변화는 나아지는 거고 발전하는 거라 생각했다. 멈춰서는 건 일종의 후퇴고 안주하는 건 지루하다 여겼다. 늘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일을 하고 색다른 생각을 하며 살고 싶었다.


한참을 나는 그렇게 살았다. 도전과 변화를 좋아하는 나는 거짓이 아니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남자 친구가 있는 호주로 떠나겠다 결심했던 이유도 단순 사랑만은 아니었다.



그런 나를 반대했던 건 한국에 있던 가족들도 친구들도 아닌 남자 친구였다. 현실적이고 준비성 많은 그는 호주에서 할 일이 없는 나를 걱정했고, 내 원래 계획대로 대학원에 가길 원했다. 시간이 걸려도 우리 둘에게 좋은 방법을 찾자고 말하는 그가 옳다고 나도 생각했다.


그 후로 한참의 시간이 걸려 그는 정말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고, 그와 나는 조금의 시간이 더 흘러 우리가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한참의 시간 동안 나는 잃을 게 많아져 버렸다. 가족도, 친구도, 일도. 차곡차곡 쌓아온 모든 것들이 아쉬워졌다. 그제야 알았다. 변화를 좋아하는 나의 뒷면에는 현재에 소중한 게 없는 내가 쓰여있었다는 것을.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보낼 때가 인생에서 제일 자유롭다고 느껴졌던 이유는 한국에서 신경 써야 하는 모든 것들이 짐처럼 답답하게 느껴졌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뜻밖에 주어진 유예기간은 답답했던 상황을 받아들이는 나를 성숙하게 했고 자연스럽게 상황도 나아졌다. 무엇보다 몇 년 후에는 떠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다 보니 내가 원래 갖고 있던 것들이 애틋해졌다. 모든 것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나는 변화가 조금 두려워졌다.


두 달 전 창원의 일자리에 붙었을 때, 나는 방법을 찾았다는 남자 친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우연일까, 운명일까. 나는 외국으로 가기 전 변화가 두려워진 내가 낯선 환경에의 적응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같은 땅에 같은 언어를 쓰는 곳이고 멀더라도 가족도 친구도 만나러 갈 수 있으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외국에 가기 전 통과해야 할 작은 관문 정도는 돼주리라 생각했다.


창원의 생활은 만족스럽다. 새로운 환경에 살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즐겁다. 늘 다른 곳에서 살고 싶었던 어렸던 나로 잠깐씩 돌아가게 해 준다. 하지만 나는 곧 현재의 나로 돌아온다. 변화가 무섭고 지금이 좋은 안주하고 싶은 나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아름다운 것은 나무의 기둥이 단단히 뿌리내렸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삼십여 년간 넓게 뿌리내린 이 곳을 떠나 작아진 뿌리로 새로운 곳에 정착할 수 있을까. 그가 내가 새롭게 뿌리내릴 땅이 되어 줄까. 나는 멈추지 않는 바람 속에 서있다. 사실은 두려워도 여전히 변화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내 결정을 바꾸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가끔은 이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으면서도, 차갑다.



바람 부는 날에 서서,







집을 구할 때 같은 가격에 큰 창이 있는 방과 더 넓은 방 중에 고민하다가 큰 창이 있는 방으로 골랐습니다. 큰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으면 행복해져서 잘 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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