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마음에 귀 기울이다
우리 남편이 달라졌어요
나는 통제하려고 하는가?
언제부터일까? 아마 종교가 서로의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드러났을 때부터 일 것이다. 그때 나는 짝에게 아내로서의 역할에 대한 나의 기대를 말한 적이 있다. 짝은 구역 모임을 다녀온 후 나에게 주변 사람들이 말한 생각을 전했다. 구역 모임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너의 남편이 너를 통제하려는 것 아니야?"라고 물었다고, 우회적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 나는 그때 '통제'라는 심리가 우리의 관계에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통제라면, 내가 ‘특정 목적을 위해 짝의 심리와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사항이 짝의 생각과 다를 때 그 차이를 어떻게 볼 것이냐가 중요하다. 차이의 내용을 볼 것인가? 아니면, 차이 그 자체를 볼 것인가? 먼저 차이를 우선적으로 느끼고 이에 따른 불편을 해소하는 대응으로 '통제'를 해석한다면, 서로의 견해 차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다행히 대화를 나눠보니 관점의 차이가 있다. 우리는 서로 그 점에 동감하고 동의를 했다. 그다음은 차이의 내용이다. 이 주제는 좀 복잡하다. 부부 관계에서 내용이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짝을 통제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나는 어느 정도 '그렇다'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원하는 모습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으나, 그 내용이 충족되기 않을 때 드러내는 나의 언행에 통제 의도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 통제일 수도 있고 영향력일 수 있다. 가끔 내 기대에 대한 결핍을 본다. 그러나 짝의 기대 관점에서 보면, 내가 놓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바람직한 부부관계란 어떤 모습일까?
바람직한 부부의 모습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부부의 삶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혼인서약을 했지만,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삶을 사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갖고 시작하지는 않는다.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합당한 답을 찾는다. 어느 날 부부관계의 근본을 나 스스로 놓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인격 존중'이다. 내가 상대방을 인격으로 보느냐이다. 인격으로 본다는 것은 각자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삶의 목적, 추구하는 가치와 신념, 생각하고 느끼는 심리, 삶의 방식이다. 어느 날 부부 사이에 갈등을 근본적으로 풀지 못한다면, 그 원인은 상대방을 인격체로 보지 못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생각이라기보다는 깨달음이었다. 상대방을 인격체로 인정하고 존중하기 않는다면, 서로 간에 인식 차이를 해소할 합리적인 방법이 없다.
서로에 대한 인격 존중이라는 시각을 수용하면서, '크리스천 아내'의 모습을 인정하고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내 삶에 대한 주관도 뚜렷하게 생겼다. 달리 말하면, 내 삶의 관심 사항에 더 집중했다. 어떤 부부는 각자 추구하는 종교나 취미, 삶의 방식이 거의 같을 수 있다. 두 사람이 같은 생활공간에서 같이 추구하는 것을 이루며 생활하는 것이다. 공유하는 내용이 많은 삶도 좋겠다. 어떤 부부는 특정 취미만 같을 수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부부는 서로 공통되는 것을 함께 추구하고 다른 점은 각자 추구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여행을 좋아하고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는 측면은 일치한다. 그 이외에 공통점이 없다. 서로의 공통점이 많은 것이 좋을 수도 있고, 공통점이 적기 때문에 좋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어떤 존재로 보며, 어떤 삶을 살고 싶은 지에 대한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부부로 살고 싶은가?
부부란, 본래의 개인적 자기와 타인의 눈에 비친 사회적 자기가 연계되고 하나로 통합된 자기를 만들어 가도록 서로 돕는 주체이다. 통합된 자기가 곧 인격체의 완성이다. 결혼은 서로 독립된 인격체라는 점을 존중하고 인격의 완성을 돕겠다는 약속이다. 부부로 살면서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그날이 빠르면 빠를수록 부부는 자기 존재감과 존중감, 행복의 본질을 알게 된다.
아내는 내가 아니다. 나와 같은 한 고귀한 존재이며 인격체이다. 남성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나는 결혼 초반부터 내가 원하는 삶을 이루기 위한 의사결정을 우선시했다. 이 과정에서 짝의 인생을 존중하지 못했다. 짝이 원하는 삶, 이루고 싶은 것, 추구하는 가치와 신념을 만족할 만큼 존중해 주지 못했다. 짝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삶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도 못했다. 인생의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짝이 추구하는 삶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인격 존중은 사고 틀이며 행동 가이드이다
일상생활에서 인격을 존중한다는 것은 서로 의견 차이가 있을 때, 대화에 쉼을 주고 한 발 물러나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한다. "지금 이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뭐지? 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뭘까? 내가 대화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뭘까?"라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인격 존중은 상대방을 향한 것도 있지만, 사실 내가 짝을 대하는 데 있어 성숙을 의미한다. 자기중심적인 해석과 평가를 먼저 하지 않는 것, 예단하지 않는 것, 짝의 말을 흘려듣지 않는 것, 진지한 상황에서 무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과 겉으로 보이는 나 간의 차이를 스스로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 즉 내적 모순을 해결하는 것 등은 모두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실천적 행동이다.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 존중이 없다면, 현란한 대인관계 스킬은 모두 헛된 일이다. 인격 존중은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부부가 서로를 대하는 '사고 틀이며 행동 가이드'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성적 사고가 쉼을 필요로 할 때, 여전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원하는 아내가 있으면 한다. 이 욕구를 나의 시선으로만 본다면, 불편이고 갈등의 소재가 된다. 지금은 내가 원하는 것의 결핍을 보지 않고, 일상에서 채워지고 있는 모습을 본다. 지금은 이러한 문제를 민감하게 보지 않는다. 인생의 후반으로 갈수록 부부로서 역할자를 앞으로 내세우기보다, 각자 추구하는 삶의 모습을 앞세우도록 돕는다. 종교를 우선적으로 중시하는 아내를 수용한다. 부부로 만나 각자 원하는 삶을 이룰 수 있도록 서로 돕는다면, 모두 만족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