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를 읽고
두 번째 리뷰(The Second Review)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1st Review)
한 가지의 이야기를 세 사람의 관점과 시각에서 자세하게 기록한 단편(연작) 소설이다. 채식주의자는 너무나 사사롭고 단순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자살 시도, 그리고 아내가 웃통을 벗은 채, 새를 물어뜯은 모습으로 긴장과 충격을 제공한다. 마치 저자 본인의 모습과 욕구를 그린 듯하였다. 2편의 몽고반점에서는 동서가 주인공이 되어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몸에 꽃의 그림을 그리는 장면과 그의 몽고반점에의 관심과 집착, 그리고 처제에 대한 욕정에서 나오는 갈등을 자세히 기술한다. 이 파트에서는 두 가지의 마음, 충격과 저질스러움의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의 하나 됨과 그의 아름다움을 저자는 말하고자 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본능적인 정욕을 행위로 보인 동서의 모습을 정당하다고 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성을 잃은 순간 죄의 늪에 빠지게 되기 마련이기에 말이다. 3편에서의 나무 불꽃은 정신 병원에 입원하여 먹기를 거부하는 동생, 영혜를 향한 언니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이해(아버지의 매)를 그린다. 나무가 되고자 하는 동생. 물과 햇빛만으로 살 수 있고, 죽으면 어때라는 외침을 하는 여인, 그 망상의 원인이 꿈이었다고 한다.
과연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가 꿈으로 나타난다고 하지만, 너무나 처참하게 평범한 삶을 무너뜨린 꿈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과거의 아픈 경험과 상처일까? 자연과 하나 되고자 하는, 아니, 조금이라도 해치고 싶어 하지 않는 민감함과 사랑 때문일까?
책에 해설이 나오긴 하지만 난해하다. 직접 듣고 싶어 진다. 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생각을...
2024년 10월 18일 (2nd Review)
여기까지의 책 리뷰를 한 후 3년 의 시간이 흐른 이 시간, 소설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내 책 리뷰를 읽는 분이 있음을 알게 되어 내 생각을 추가로 기록하고자 한다. 사실 이 책 리뷰를 적어 놓았는지도 잊고 있었다.
이 책 <채식주의자>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책의 리스트에 올라와있다. 물론 마음에만 적혀있다. 도서관에서 무심코 읽게 된 이 책의 스토리는 짜임새가 있는 듯 없는 듯 읽기에 쉬운 듯 어려운 듯 아무튼 난해했다. 그리고 삼류 로맨스 소설이나 포르노처럼 자극적이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가 없었고 심지어 작가의 정신세계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나쁜 기억으로 남아있는 책이다.
그 책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하기에 의외였고 그 평을 읽어보니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마지막에 존재론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주인공은 존재론에 대한 혼동이 있었던 것이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존재의식이 없어 미친 행동을 한 것이다. 인간과 동물에 대한 명확한 존재의식. 동물과 식물에 대한 존재 의식. 과연 동물은 무엇이며 식물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 없기에 마지막 나무 불꽃에서 주인공은 물과 햇빛으로만 사는 나무가 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 종류의 생명체는 다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역할이 다름을 알지 못해 생긴 정신적 심리적인 문제를 가져왔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인가? 동물은 무엇인가? 식물은 어떤 역할을 하는 자? 에 대한 생각과 의식이 참 중요함을 느끼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 상을 받았나 보다고 나름 정리를 해본다.
성경은 창세기 2, 3장을 통해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세 가지의 존재와 역할이 완전히 다름을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을 통해 혹은 성령을 통해 신을 아는 지식에 자라고 신을 찾고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 도서로 적합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난 지금도 여전히 좋지 않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주는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기에 혹은 이해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 청소년이 읽게 된다면 아니 성인일지라도 그리 좋은 사고나 정서를 주는 책은 아니다. 책을 읽은 몇 년이 지난 이 시간까지 지금도 기분이 나쁜 책이기에 그렇다. 아버지의 폭력성과 제부의 욕정 그리고 주인공 여성의 자살시도와 정신병적인 행위는 보는 이에 따라 따라 하고 싶어지게 한다. 아니, 인간의 죄성을 미화시키고 타당하게 만들기에 그렇다고 본다.
게다가, 남성의 폭력성과 욕정에 초점을 두어 페미니즘의 논란을 야기시킨다. 그로 인해 인간, 즉 남성과 여성을 니누고(딸과 아버지) 찢고(새를 물어뜯듯) 부부의 관계를 파괴(이혼)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곧 사탄이 하는 짓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난 이 책이 좋은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인간의 존재론에 대한 책이라고 하니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면에 대해 학생들을 가르친다거나 토의 혹은 토론을 할 주제로는 좋은 듯하다. 내가 책 리뷰를 두 번이나 쓰게 하였으니 그런 면에서는 좋은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아파트 카페 새 바리스타는 내 대학생 후배이기도 하다. 그녀는 책을 읽다가 중단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책을 무척 좋아하는 아들에겐 도무지 권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어떤 남성은 댓글에 아내가 이 책을 읽고 불륜을 저지르고 이혼을 했다고 하니,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은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노벨상을 받았다니 축하한다. 작가와 가족 모두가 경제적 심리적 정신적으로 행복하고 풍요로워질 것을 생각하니 나도 덩달아 즐거워진다. 바람이 있다면 좀 더 건강한 정신과 바른 지식과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좋은 책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
칠레에서 온 동네 아저씨(완전 T 형)는 나와 함께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가끔 내게 에스파뇰을 가르치고 있다. 며칠 전 그는 이런 현상(대중심리: populism)에 대한 비판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한국인인 자신의 가족의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에 대해 비판하곤 하는 그는 한 달에 한 권 팔리던 책이 갑자기 노벨상을 받았다고 이리 난리를 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작가의 이상한 행동과 말에 대해서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서 세상은 돌아가나 보다!라는 생각이 든다. 지구가 돌듯이 말이다.
낮에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도서관 봉사자인 한 여자분이 니에게 책 쓰시네요... 노벨상이라도 받게요? 하는 말을 한다. 노벨상... 놀리는 말로 들리기도 했지만 그만큼 책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면에서 좋기도 하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내 딸도 서점에 가서 책을 산다니 참 좋은 현상이다. 내 책 <영어 참견러...>은 읽지도 않은 채 말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바라보는 한 어린아이의 리뷰라고 생각해 준다면 이 새벽녘의 수고와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Ps. 크리스천인 내가 바라는 상은 오직 하나임을 말하고 싶다. He would reward my good deeds that i have done for my neighbor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