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밤 중에 남편이 운전을 하던 중에 내비게이션의 오작동인지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탓인지, 일방통행길로 진입해 죽음의 위험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유언장 작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 "그럴 필요 없어. 모든 것은 살아있는 자에게 맡겨!" 나름 현답인듯했다. 죽음을 앞두고 정리까지 하는 일을 사서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살아생전의 모습과 유사하다. 늘 미리 준비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도 그저 도착 장소만 알고 운전대를 잡는 남편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이다. 미리미리 대책을 세워두고 준비를 하는 나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은 말이다. 요즘 결혼식을 준비하는데도 일 년이 걸린다는데, 나도 나의 죽음을 일 년 정도는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최소한 일 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는 전제하에 나는 나의 유언장을 쓰고 있는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다. 사자성어로는 전분세락이라 한다. 아무리 천하고 고생스러운 삶이라도 이승이 저승보다는 낫다는 말이다. 이승은 우리가 살고 잇는 세상을 말하며 저승은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이 머무는 세상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 세상에 대한 논의는 인간에 대한 사유에서 큰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21세기 AI시대를 사는 인간이지만 여전히 풀지 못하는 숙제 중에 하나다.
죽음이 꼭 나쁘지만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인간으로 하여금 '사느냐 죽느냐'와 같은 일차 방정식의 문제만이 아닌 '저승이 있는가?'와 같은 이차방정식을 숙제로 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3차 방정식으로만 풀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은 후에 육신과 함께 영혼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혼만이 저승으로 가는지 혹은 영만이 가는지, 아니면 영혼 둘 다 같이 가는지 혹은 따로 가는지 등에 대한 문제다. 수학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나로선 생각만 해도 골치 아파온다. 하지만, 이것이 죽음의 문제를 푸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에 어떡해서든 풀어야만 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민은 철학자들의 조상 격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일명, 천국과 같은 이데아(idea)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논의가 아직도 철학자들 사이에서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풀지 못한 듯한 숙제인 듯하다. 육체와 영혼이 하나(body+soul=1) 면 일원론, 몸과 영혼이 두 개(body + soul =2) 면 이원론, 혹은 몸과 영과 혼(body+spirit+soul=2)을 각각 따로 3가지로 구분할 것인지에 여전히 논쟁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풀기 어려운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영혼몸. 인간의 구성요소라 볼 수 있는 육체와 영혼, 혹은 몸(body)과 영(spirit)과 혼(soul)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풀기 쉬워진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득하거나 과학적으로 입증하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논쟁에 대해 지혜의 왕이라 불린 솔로몬은 간단하고 명확하고 정리를 해준다.
전도서( Ecc ) 9장
3.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3. This is the evil in everything that happens under the sun: The same destiny overtakes all. The hearts of people, moreover, are full of evil and there is madness in their hearts while they live, and afterward they join the dead.
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4. Anyone who is among the living has hope —even a live dog is better off than a dead lion!
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10. Whatever your hand finds to do, do it with all your might, for in the realm of the dead, where you are going, there is neither working nor planning nor knowledge nor wisdom.
죽음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편재성(ubiquitous)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모태에서 나온 날, 즉 생일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자신이 죽는 날은 알 수가 없고 죽은 날, 즉 사망일은 예측할 수 없고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이것이 죽음을 나쁘게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엄마는 천만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도 아니고, 암에 걸린 것도 아니고, 치매에 걸린 것도 아니고, 뇌사 상태에 빠진 것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생각만 해도 슬프다. 죽음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죽음이란 떠나감이고 이별이고 아픔이기에 생각만 해도 나를 슬프게 한다. 더욱이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 곧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그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는 것은 큰 고통이지만,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이 시간을 엄마와 함께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고린도후서( 2co ) 1장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9. Indeed, we felt we had received the sentence of death. But this happened that we might not rely on ourselves but on God, who raises the dead.
엄마의 주치의가 막내가 방문하기로 되어있던 6월을 넘기기 힘들겠다고 말한 후, 당황하지 않게 미리 준비하자는 취지로 엄마의 장례식과 장례 과정에 대해 조심스럽게 오빠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제, 아버지 장례를 치러본 경험으로 보면, 환자가 숨을 거두면 근처 병원 장례식장 사용이 가능한지 알아보고나서 시신을 옮긴다. 오빠가 미리 상조회사에 장례보험에 가입했기에 장례의 모든 절차는 장례지도사에게 맡기면 된다. 장례식을 위한 보험도 가입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죽음 준비물이 너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최근에 만난 중년의 여성은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장례식에서 영정사진을 들어주길 외손주에게 부탁하면서, 한 가지는 해결되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70대이자 음악을 좋아하는 한 지인은 자신의 장례식에서 사용할 음악을 골라 놓았다고도 한다. 엄마에게 이모(자신의 여동생)에게 연락을 해 면회를 오게 할지를 물으니 "장례식에나 와야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건강이 좋지 않은 이모를 힘들게 하기 싫다는 의미겠지만, 죽은 후에 찾아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죽음 후의 절차인 장례식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에 왜 자신의 장례식을 걱정하며 준비하는 것인지. 죽어서도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죽어서 냄새나는 시체가 되었을지라도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는 양가적인 마음인 것인지.
만약 죽음 준비가 이러한 것이라면 난 나의 죽음을 결코 준비하지 않으련다.
메멘토 모리.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책과 영화를 통해 유행처럼 번졌다. 실제, 임종체험을 위해 관에 들어가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웰-다잉(well-dying)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중에 하나가 유언장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임종과정에 있는 엄마도 유언을 하지 않으시고, 나의 시어머니와 아버지의 유언장도 당연히 없다.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으신 후, 긁적거린 노트가 남아있긴 하지만, 유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예 없다. 생각해 보면, 유언장 내용의 대부분이 재산정리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한다. 따라서, 나의 양가 부모님들은 남길 유산이 전혀 없기에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주기 때문에 인생의 중요한 모토가 되어준다. 그렇기에 죽음을 기억하라는 글이 새겨진 동전을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는 유튜버도 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남은 날이 하루라면, 난 지금 이 시간 이 글을 쓰고 있을 것인가? 죽음의 순간까지 글을 쓴 작가가 있긴 하다. <아침의 피아노>를 쓴 저자는 자신의 죽음의 과정을 글로 기록했다. 하지만, 난 그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글쓰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왜냐하면 저자는 죽음의 순간까지 본인이 어디로 가야하는 지,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지 대비하지 않은채,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의 내용은 단순한 자신의 몸 상태와 일상을 기록한 것이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복음과 교회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글을 통해보면 그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땅에 머물러 있었고 하늘을 바라보지 않은채 죽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