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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구름 Apr 12. 2024

엄마를 향한 엉킨 실타래

처음 카페에 들어섰을 때부터 분주함이 느껴졌다. 카페로 오는 차 안에서 프리마켓이 열린다는 얘기를 언니에게 들었기에 그 준비로 바쁜가 하고 보다 생각했다. 음료와 빵을 주문해 놓고 잠시 카페를 둘러보기로 했다. 2층으로 올라가 보니 거기엔 테이블 설치가 한창이었다. 책임자로 보이는 여성분께서 지금은 준비 중이고, 12시부터 행사가 시작된다고 안내해 주셨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오기로 하고 1층으로 내려왔다. 미리 주문해 두었던 음료와 빵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12시가 되자 행사 준비가 되었다는 안내를 받았다. 잠시 후 인문학 강의도 진행된다고 했다. 2층으로 올라가 양말 공예 체험으로 꽃 모양 키링을 만들고 있었다. 뒤에서 언니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언니의 지인과 나 역시 짧은 인사를 나눴다.



체험을 마치고 우리 자리로 다시 돌아와 앉았다. “여기 앉아도 돼요?"라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좀 전에 언니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지인이었다. 그렇게 우리 셋은 한 테이블에서 인문학 강의를 듣게 되었다. 강의는 길지 않았다. 강의가 끝난 뒤에도 언니의 지인이 자리를 옮기지 않으시기에 혼자 오셨냐고 물었다. 행사를 진행하는 분과 함께 왔는데 일을 하고 있어서 우리 테이블에 놀러 왔다고 했다. 나와는 처음 만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주도하실 뿐만 아니라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면 눈빛에서부터 경청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들어주셨다. 알고 보니 언니의 사촌 동생이 육아로 힘들어할 때 상담해 주셨던 심리 상담사분이었다. 사촌 동생과 아이는 상담을 받은 뒤 정말 많이 좋아졌고, 지금까지도 안부를 주고받으며 지낸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육아로 흘렀다. 심리 상담사분께서는 나에게 질문을 많이 하셨다. “혹시 결혼하셨어요?”를 시작으로 아들이 둘이라는 사실까지 듣고 난 뒤에는 아이들 성향은 어떤지, 육아하면서 힘든 점은 없는지도 물으셨다. 어쩌다 보니 산후 우울증이 걸렸던 이야기까지 털어놓게 되었다. “산후 우울증이 있으셨구나, 말씀하시는 거 들었을 땐 안 그러셨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잠시 망설이다 내가 말했다. “사실 지금도 완전히 극복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육아를 하다가 가끔 우울감을 느낄 때가 있거든요. 아이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화를 냈을 때는 자책도 많이 하고요. 그러다 보면 엄마 자질이 부족하게 느껴지고 그게 우울감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그럼 그럴 땐 어떻게 하세요?” 상담 선생님의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저는 그리 활동적인 사람은 아니라서요. 밖에 나가거나 누구를 만나서 푸는 건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모되어서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주로 집에서 책을 읽고, 글도 쓰고 그래요. 온라인 독서 모임 같은 것도 하고요.” 내 말이 끝나자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와 이런 엄마만 있으면 우리 상담소 망하겠는데요? 대부분은 문제가 생기면 안 좋은 쪽으로 풀려는 경우가 더 많거든요. 아이들을 방치하고 술을 드시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문제가 심각해지고 나서야 상담소를 찾아오세요. 그런데 조금이라도 나아지려고 책도 읽고 노력하는 엄마가 어디 흔한가요? 똑 부러지셔서 앞으로도 문제없이 잘하실 것 같아요.” 그 말에 나는 "아니에요. 한참 부족해요" 하며 얼음이 녹아 싱거워진 레모네이드를 연거푸 들이켜기만 했다. 아이들에게 별거 아닌 일에 심하게 화를 냈던 오늘 아침을 떠올리자, 마음이 불편해졌던 것이다.      



‘언니 정도면 정말 훌륭한 엄마야 그런 걱정하지 마.’ 나에게 육아 고민을 털어놓는 엄마들에게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괜히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내가 들었을 땐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애쓴다는 것 자체가 훌륭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이런 말을 해 주지 못했다. '그 정도면'의 기준이 너무 높은 탓이다. 도대체 나는 왜 이토록 스스로에게 가혹한 것일까? 심리 상담사와의 만남 이후 느꼈던 감정들과 함께 머릿속에서 이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실은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 왔던 질문이기도 했다. 머릿속은 실타래처럼 마구 엉켜 버렸다.



불현듯 3월부터 듣고 있던 에세이 쓰기 수업 과제가 떠올랐다. 과제 제출 기한을 놓치지 않겠다는 책임감으로 의자에 앉아 글을 썼다.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엉켜 버린 채로 쓴 글이었다. 글을 쓰고 나니 더욱더 괴로워졌다. 산후 우울증마저도 달래줄 틈 없이 스스로를 다그쳤던 진짜 이유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반쪽짜리 글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건 나 자신조차도 속이는 일이었기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 부끄러움은 이 문제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 냈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극복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했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해 보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 안방 문은 항상 꼭꼭 닫혀 있었다. 부모님께서 외출할 때는 물론이고 부모님이 집에 있는 날에도 안방 문은 열려 있지 않았다. 그 안에 도대체 뭐가 있길래 매번 문이 닫혀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엄마와 아빠가 외출해서 집에 없는 날이면 동생과 함께 그곳을 탐험했다. 안방에만 있는 티브이의 리모컨을 만져 보기도 했고 서랍도 열어서 살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찾지는 못했다. 안방 문이 굳게 닫혀 있어야만 했던 이유를 알게 된 건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난 뒤였다. 담배 때문이었다. 엄마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건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중학교 3학년 때 우리 가족은 이사했다. 새로 이사한 집은 안방 문을 닫을 수가 없었기에 담배를 피우는 엄마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러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근근이 이어왔던 식당 운영은 빚만 손에 쥔 채 접어야 했고 월세를 내고 살던 집에서조차 살지 못할 정도의 형편이 되었다. 가난에 쫓기다 우리 여섯 식구가 겨우 몸을 누이게 된 곳은 100만 원짜리 집이었다. 땅은 당연하게도 우리 것이 아니었고 집 자체만 100만 원을 주고 산 것이라고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때 부모님은 우리에게 이삿날을 고작 며칠 앞두고서야 이사 갈 거라고 알렸을 뿐 그 무엇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집의 크기가 날로 줄어들고, 집 안에 있었던 화장실이 집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보며 가정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짐작해 볼 뿐이었다. 이삿날 처음 마주하게 된 집은 폐가를 연상시켰다. 심지어 그 집에는 이미 터줏대감도 있었다. 문지방에 몸을 숨기고 있던 커다란 구렁이였다. 사람이 산 지 오래되었단 뜻일 것이다. 집 구렁이는 내쫓으면 안 된다고 하는 어른들의 말을 들었다. 알아서 집을 떠나 줄 때까지 짐을 옮기지 못하고 마당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안방 문을 닫을 수 없었다는 말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집의 생김새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집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생겼다. 가장 왼쪽부터 부엌, 안방 겸 거실, 가장 오른쪽 방은 나와 여동생이 썼다. 현관문은 따로 없었고 각각의 방은 바깥에서 따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조였다. 안방 겸 거실에서 온 가족이 밥을 먹었다. 밥상을 물리고 나면 나와 여동생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이 그 자리에 이불을 깔고 잠을 잤다. 이런 구조 탓에 안방 문은 더 이상 꼭꼭 닫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감추려고 애썼던 비밀 또한 더 이상 지켜지지 못했다. 이사 온 뒤로 엄마는 안방 겸 거실에서 우리 사형제가 모두 보는 앞에서 담배를 태웠다. 전에도 엄마가 흡연하는 게 아닐까, 의심을 해 본 적이 있어서 크게 놀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단지 담배 냄새가 베어 학교에서 오해받게 되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되었다. 그렇지만 술은 문제가 되었다. 아빠는 트럭 운전을 했다. 지방으로 물건을 나를 때에는 며칠씩 집을 비웠다. 그럴 때면 엄마는 못 이길 정도로 술을 마시곤 했다. 쌀은 수시로 동이 났고, 큰 반찬통 하나를 꽉 채워 반찬을 해둬도 한두 끼 먹었을 뿐인데 다 떨어져 바닥을 보일 때면 한숨부터 나왔다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돈에 대한 걱정이 술을 불렀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또 하나의 이유는 아빠였을 것이다. 넉넉하지 않은 것은 통장 잔고뿐 아니라 아빠의 다정함이나 배려심도 그랬다. 낮엔 바쁜 일을 하면서 그럭저럭 지내다가 고요한 밤이 되면 무너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다정하지 못한 아빠로 인해 느끼는 외로움과 떨어진 쌀독의 쌀은 또 무슨 돈으로 채워야 할까, 하는 괴로운 생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해 잔에 술을 붓고 또 부을 수밖에 없었다는 걸 어른이 된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소연과 원망의 대상이 내가 되어야 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사 온 다음 해,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한 번은 실내화가 찢어져서 엄마에게 사 달라고 했는데 며칠째 사주질 않아서 테이프로 칭칭 감고 다녔다. 안경이 망가져서 안경알이 빠졌는데 고치는 데 돈이 많이 들까 봐 실로 꿰맨 뒤 고정시켜서 다녔다. 신발 밑장은 언제 갈라졌는지 비만 오면 줄줄 샜지만 새로 구입해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말해봐야 엄마는 한숨만 쉴 테니까. 점점 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고 결국엔 입을 꾹 닫고 말았다. 부모님의 경제 사정을 생각해 말하지 않았던 것인데 엄마는 그런 나의 마음을 알지 못했고 예전처럼 엄마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 내 행동을 엄마에 대한 무시와 반항이라고 오해했다. 술을 마시다 취하면 엄마는 어김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나는 곧 무언가를 잘못한 아이가 되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무릎을 꿇은 채 혼이 나야만 했다. 그때 들었던 말들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 말들에 벤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나는 점점 더 자신감 없는 아이가 되어갔다. 스스로를 못난 사람이라 여기게 되었던 것 같다. 남들이 칭찬해도 잘 믿지 않았다. 남에게는 작은 것도 찾아서 칭찬하고 실수에도 관대하면서 내가 저지르는 작은 실수는 견디지 못했다.      



그것은 엄마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러지 말자고 다짐해도 그랬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공부를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 남들이라면 칭찬받을 만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게는 그러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과하게 화를 내고 나면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거울을 보며 볼이 빨개지도록 뺨을 때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관대하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나는 아이들에게 과하게 화를 냈다고 생각하면 진심으로 사과한다.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끝까지 말해 보라고 기회를 주기도 한다. 아이들의 재미없는 얘기도 최대한 잘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피곤해도 단 한 권의 책이라도 꼭 함께 읽는다. 그리고 항상 공부하며 좀 더 나아지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좋은 엄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 자격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가진 것 중 부족한 부분만을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높은 잣대 위에 올려놓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작은 실수도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채찍질하며 말처럼 달려왔다. 그게 나를 지치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나의 모습이라는 걸 안다.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일들이 좀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해 애쓰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나를 미워하는 것으로 내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겨울이 되면 손재주가 좋은 엄마는 털모자와 털목도리를 직접 떠 주셨다. 그걸 하고 다니면 사람들이 누가 만들어 주었냐고 물었는데 “엄마가 떠 주셨어요. 우리 엄마는 구슬로 가방도 만들고 그래요.”라고 대답할 때마다 목도리에 얼굴을 묻으며 쑥스러워했지만 가려진 입은 늘 웃고 있었다. 사랑을 듬뿍 받는 아이가 된 것 같아서였다. 나날이 집안 형편은 어려워졌지만, 저녁이면 어김없이 엄마는 우리들에게 따스한 밥을 지어 주셨다. 엄마의 기억이 늘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나 자신에게 가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전부 엄마 때문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다. 엄마가 되어 살다 보니 나의 엄마를 한 사람이자 여성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늘었다. 이대로 가다 보면 언젠가 내 안에 엉켜 있던 원망과 슬픔의 실타래가 어린 시절 엄마가 떠 주었던 털모자가 되어 남겨지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실은 그런 날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중이다. 지금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다.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가 엄마에게 담담하게 물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힘들더라도 엄마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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