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집에서 사는 6년 동안 늘 밥을 가지고 옥죄임을 당했다. 일 하기 싫으면 처먹지도 말라는 말을 수시로 들었다. 큰아버지네 밥은 쌀밥과는 거리가 멀었다. 쌀밥은 일 년에 한두 번이요, 대부분은 옥수수 밥이 주식이었다. 옥수수를 방앗간에 가져가면 옥수수 알의 껍질을 벗긴 후 쌀알 정도의 크기로 쪼개어 옥수수쌀을 만들어 주었고 그것으로 밥을 지어먹었다.
옥수수밥은 따듯할 때 먹으면 고소하고 부드러워서 먹을 만했지만, 식으면 딱딱하고 거칠어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먹다가는 입천장이 까졌다.
큰집에서 사는 동안 엄마와 나는 큰집 식구들과 달리 별도로 떨어져 밥을 먹었다. 알루미늄 그릇 하나에 엄마와 내가 먹을 밥을 반 그릇 정도 퍼 주었고 숟가락 두 개만 주었을 뿐 젓가락을 준 적이 없었다. 엄마는 왼손은 쓰지 못했지만 오른손을 쓰는 데는 장애가 없었다. 엄마와 나에게 젓가락을 주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겨울이면 날마다 산에 가서 땔감을 구해와야 했다. 보통 오전에 두 차례, 오후에 두 차례 정도 산을 오갔다. 겨우 내 땔감에 쓸 잡목들을 거둬들이다 보면 처음에는 집 가까운 곳부터 시작해서 점점 먼 곳으로 가야 땔감을 구할 수 있었다. 설을 막 지난 때 먼 곳에서 땔감을 잘라 지게에 지고 집을 향했다. 먼 산에서 땔감을 구하다 보니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전에 두 차례 먼 산을 다녀온 터라 몹시 배가 고파 부엌 근처를 얼쩡거리며 사촌 형수 눈치를 봤으나 밥을 줄 생각이 없었다. 형수가 싸늘하니 한 마디 했다. "여태 놀다 와서 밥 줄 때를 기다리는 거야?" 먼 산에서 땔감을 구해 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게 마련인데, 형수는 내가 게으름을 피우다 늦게 온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사촌 형수에게 상황 설명을 하기에는 너무나 구차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집을 나서서 조금 걷다가 길거리에서 사돈댁(형수의 친정엄마)을 만났다. 그분이 나에게 밥은 먹었느냐고 지나가는 인사를 하는데 설움이 복받쳐 그 자리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열네 살 겨울이었다.
엄마의 병세가 악화되고, 목마름으로 부엌 바닥에 처박히는 일이 있은 후 엄마는 점심을 먹지 않았다. 예전과 같이 출근할 때 밥 한 공기와 김치 한 종지를 상에 차려놓곤 했지만, 벌써 열흘 가까지 점심 밥상을 건드리지 않았다. 하루 종일 일하고 자전거를 몰고 한 시간 가량 달려 집으로 오면 늘 배가 고팠다. 엄마가 점심을 마다했을 때 처음에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저 상에 남아있는 밥과 김치에 고추장을 한 수저 넣고 볶아 엄마와 한 술씩 뜨고는 잠들어 버렸다.
엄마가 점심을 남기는 일이 여러 날 계속된 후 물어보았다.
"엄마 왜 점심 안 먹어?" 엄마가 나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야이야(얘야) 내가 애미가 돼 가지고 니를 이 고생시키면서 뭔 염치가 있어서 점심까지 먹나..."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엄마의 그 말이 얼마나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픈 말인지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