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틀집으로 거처를 옮긴 지 여러 달 후 금대교회 바로 아랫집에 살던 여자가 솜을 틀러 온 적이 있었다. 여자가 나를 보더니 알은체를 했지만 나로서는 별로 반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 동네에 사는 동안 그 여자와 말을 한 번도 섞어본 적도 없으니, 알은체 하는 이유야 솜튼 값을 깎아 얼마간이라도 돈을 아끼려는 속샘일 것이었다.
그 여자에게는 나 보다 한 살 아래인 재경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동네에서 껄렁거리는 애들과 한 패가 되어 나를 괴롭혔었다.
한 번은 교회에서 저녁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재경이가 들어와서 예배 끝난 후, 교회 앞에서 보자고 했다. 그동안 얼마간의 돈이라도 내놓으라는 위협을 당해오던 터라, 몰매를 놓으려는 수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피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예배가 끝나기 전 교회를 빠져나와 엄마와 사는 창고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아니나 다를까, 예배가 끝난 후 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 놈들이 몰려와 문을 차며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벽력같이 소리를 지른 후에야 놈들은 내일 보자며, 한 번 더 문을 걷어 찬 후 사라졌다.
얼마 후 그 놈들에게 잡혀 마을에서 좀 떨어진 빈집으로 끌려가 심한 욕설과 함께 매타작을 당했다. 나를 괴롭히던 놈들 중 몇 명은 나와 알고 지내던 사이었고 교회도 함께 다녔었다. 그들은 고등학생이 되고 얼마 후부터 몰려다니며 거칠게 굴기 시작했고, 한 번은 트럭 운전사가 마을에 차를 세우고 쉬다가 그 놈들과 시비가 붙어 큰 봉변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기에 그 여자에게 내가 호의를 베풀 이유는 전혀 없었고, 사실은 홀대를 한 샘이었다. 그 여자는 몇 년을 앞뒤 집에서 알고 지냈는데, 냉정하게 아는 체도 안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받을 돈을 알뜰하게 다 받았다. 소심한 복수였다.
금대리에서 사는 동안 교회에 다니는 분들에게 은혜를 많이 입었지만, 그곳 사람들에게 설음도 받았다. 엄마의 장례식 때 운구를 위해 마을을 지나가야 했으나, 이장이 나서서 길을 막았다. 마을로 장례행렬이 지나가면 운이 나쁘다는 이유였지만, 다른 마을 사람들이 상을 당한 경우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타지에서 굴러들어온 돌이니 텃세를 부렸던 것이리라.
결국 마을 옆 농수로를 따라 난 좁고 험한 길로 엄마를 모셔야 했다. 엄마는 이 마을에 올 때 내가 끄는 손수레를 타고 왔던 것처럼 마지막 가는 길에도 손수레를 타고 마을을 떠나야 했다. 엄마의 관은 교회분들이 만든 종이꽃으로 장식을 했다. 그때에도 형은 연락을 할 방법이 없어 장례식에 오지 못했고, 운구 행렬이 큰집 앞을 지나갔으나, 큰아버지는 집에 있으면서 내다 보지도 않았다. 엄마는 "사람은 은혜는 모래에 새기고, 원한은 바위에 새긴단다. 니는 그러지 마라"라는 말을 늘 했었다. 그렇지만 난 엄마 당부와 달리 마을 이장과 형, 큰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을 마음속 바위에 새겼다.
아무리 모진 세월이어도 때가 되니 사랑이 찾아들었다. 교회 아랫마을에 사는 여자아이를 혼자 좋아하게 되었다. 귀엽고 뽀얀 얼굴에,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에게 함부로 하지도 않았고, 교회일을 할 때면 나를 따라 이런 저런 일을 잘 도왔다. 몇 년을 두고 그 아이 덕에 마음을 앓았다. 그 아이는 괜찮은 부모를 둔 학생이었고, 반면 나는 기댈 사람 하나 없이 초라한 무지랭이었다. 혹시 내 마음을 들킬까 노심초사하면서도 눈길은 늘 그 아이를 쫓았었다.
한 번은 그 아이가 나에게 볼펜 한 자루를 선물했다. 그 아이가 준 선물이기에 아까워서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일기에 내 처지에 누굴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짝사랑이어도 사치스러운 것이라 썼다.
거처를 옮긴 후에도 한 동안 그 아이가 보고 싶어 금대교회를 찾았었지만 허전한 마음만 점점 커졌다. 어느 날 그 아이에게 "나 이 교회 한 동안 안 올 거야, 다음에 보자"라고 했다. 아이는 뜻 모를 눈물을 한 방울 보인 후 생긋 웃었다. 야학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한 직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