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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승 Mar 13. 2020

찐빵

야학에 입학한 얼마 뒤에 야학에서 고향 친구 선도를 만났다. 알고 보니 선도는 나 보다 일 년 먼저 야학에 입학해서 공부를 했고, 검정고시를 위해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선도와는 고향에서 같은 학년이었고, 우리 집에 놀러 와 하룻밤 자고 간 적이 있을 정도로 친하게 지낸 친구였다. 고향을 떠난 후 친구들과 연락이 다 끊어졌고, 사실 고향에 대한 기억도 얼마 남아있지 않았었다.

 

야학에서 만난 선도는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좋아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서로 반가움을 나누고, 고향 친구들의 소식도 듣고 내가 살아온 이야기도 대충 해 주었다. 선도는 우리 집에서 자고 간 이야기를 흐뭇한 기억처럼 꺼냈다.

"한승아, 내가 왜 느네 집에 자러 간 줄 아냐? "나야 모르지, 뭔 이유가 있었나?"

"느네 엄마가 빵 만들어 장사하셨잖아, 난 그 찐빵 얻어먹고 싶어서 느네 집에 갔었던 거야. 우리 는 느네 엄마가 만든 찐빵 한 번 먹는 게 꿈이었다, 로망이었다구"


엄마가 만든 찐빵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어떤 아이들에게는 꿈이고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가 찐빵을 만들어 팔 때에 늘 나를 위해 찐빵 몇 개 정도는 따로 남겨두곤 했다. 엄마의 찐빵은 식은 다음에도 부드럽고 달콤했다. 난 찐빵의 껍질 부분을 살살 벗겨 먼저 야금거리며 먹은 후 기포가 가득한 부드러운 빵을 그다음에 먹고, 단팥 소를 맨 나중에 먹었다. 는 빵을 좋아하긴 했지만,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엄마는 집에 없고 밥 대신에 찐빵 몇 개만 있는 경우가 많아서 어떨 때는 심술이 나기도 했었다. 나에게는 그저 그런 빵인데, 선도는 빵 하나를 위해 우리 마을에서 십리도 넘는 설론에 살면서 우리 집에 와 밤을 기다렸던 것이다.  

     

가마솥에서 빵이 익을 때가 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엄마는 빵이 쪄지는 동안 솥을 잘 지키고 있으라 시켰다. 빵이 한창 부풀어 오를 때 누군가 솥을 열어 찬바람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부풀어 오르던 찐빵이 거품 꺼지듯 쭈그러들었고, 곰보빵이 되어 팔 수 없게  되었다. 마는 곰보빵이 나오는 날이면 늘 같은 말을 했었다. "암만 고생해서 빵을 맹글어두 한 번 정성이 부족하면 다 헛고생이여" 


사월 검정고시가 다가오자 야학은 밤낮으로 열려 있었다. 어떤 학생들은 직장에 휴가를 내기도 했고, 공장을 그만두고 아예 시험을 치를 때까지 공부에만 매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공부에 재미를 붙인 편이어서 한 번에 전과목을 합격할 수 있을 것으로 내심 기대를 했었다. 검정고시는 과목별로 시험을 치러서 60점이 넘는 과목은 합격으로 처리하고, 성적이 낮은 과목은 다음에 다시 시험을 봐야 했다. 야학에 입학하고 1년이 된 때에 처음 검정고시를 봤지만 일부 과목은 합격을 하지 못했다. 전과목 합격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상당히 실망스런 결과였고, 전 과목을 다 합격한 사람은 승숙이 밖에 없었다. 승숙이는 야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늘 일등을 했다. 승숙이를 이겨 보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새 1년이 지나 야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생이 오십 명 가까이 되었지만, 실제 졸업을 한 사람은 열 명이 조금 넘었고, 검정고시에 완전하게 합격한 사람은 승숙이 한 명이었다. 험에 합격하지 못해 무척 서운했고, 특히 승숙이는 붙고 나는 떨어졌다는 사실에 속이 상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오직 공부에만 매달렸는데 몇 달 후  시험을 치를 때는 공부 실력이 많이 늘었다며 선생님들이 격려를 해 주었다.

 

그즈음에 형이 나타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솜틀집으로 찾아와 문 앞에 서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와 큰집을 나온 후 그리 애타게 기다리던 형이었다. 엄마는 늘 나보다 형을 챙겼고, 나와 둘이 지내는 동안에도 형 걱정을 놓은 적이 없었다. "엄마 그리 가신 거 금대리 사촌 형한테 들었다" 그 말속에는 미안함과 후회가 담겨 있었겠지만 난 냉랭하게 형을 대했다. "엄마 죽은 줄도 모르고 혼자 잘 살았으니 좋았겠네..... 영영 연락 끊고 살지 뭣하러 왔어?" 형은 할 말을 찾느라 고심하는 모양이었지만 형이 뭐라고 하던   말을 기 싫었다. 그렇지만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고우나 미우나 형은 내  유일한 피붙이였고 서로 기댈 둔덕이 되어야 했다. 형은 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기고 떠났고, 연락이 닿아서 안심이 되었다


솜틀집에서 지내는 동안 봄에서 가을까지는 마루방에서 지냈지만 11월이 넘어 날씨가 추워지자 난방이 안 되는 그 방에서 사장님 아들이 쓰던 문간방으로 옮겼다. 당시 사장님 아들은 신학대를 졸업하고 전도사님이 되어 작은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전도사님은 추운 겨울에 새벽기도를 하고 와서는 언 손을 자고있는 내 등짝에 넣고 따끈해! 아유 따끈해! 완전 찐빵이다, 찐빵~ 하면서 장난치기를 좋아했고, 나도 때때로 같은 방법으로 반격을 했다. 따듯한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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