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인데도 어둑어둑한 게 곧 비가 쏟아질 것 같다. 늦은 밤부터 비 예보가 있었지만, 영종도에서는 조금 일찍 비를 맞이하려나 보다. 기복이 심한 여느 섬들의 변덕스러운 날씨보다 영종도의 기후는 대체로 온화한 편이어서 이렇게 우중충한 날씨에도 외출을 망설이게 하지 않는다.
퇴근길, 인천공항에서 영종 해안 남로를 타고 공항신도시로 향할 때 늘 마주치는 이정표가 있다.
백운산-용궁사-구읍뱃터
영종 지역의 상징적 주로이며 대표적인 사적지이다.
그리 높지도, 가파르지도 않아 사계절 소풍 즐기듯 가볍게 산행하는 백운산과 소박한 어촌마을의 시골 느낌 물씬 풍기는 구읍뱃터는 내가 즐겨 찾는 힐링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용궁사는 불교 신자가 아닌 탓에 지금껏 가본 적이 없었다.오늘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찾아 가 보기로 한 건 전통 산사 문화재 활용사업으로 용궁사에서 전통체험 공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영종도의 유일한 사찰인 용궁사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굽이굽이 좁은 산길을 따라 10여 분 걸어 올라갔을까. 산자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사찰이 나왔다. 백운산 자락의 초입에 자리 잡은 탓인지 영종도 주민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등산로 대문같이 느껴진다.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니 어느덧 천년이 훌쩍 뛰어넘은 세월이다. 천년의 세월 동안 고찰은 낡고 퇴로 한 기색이 역력해 보여도 이 땅에서 묵혀온 시간만큼 고상하면서 담박한 느낌이다. 영종도의 옛 발자취를 찾을 수 있는 살아있는 화석이며 감히 영종도의 터줏대감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불교 신자들만 찾는 곳이라 생각하고 10년 넘게 이곳에 살면서도 가 볼 생각도 못 한 나로서는 막상 찾아 가 보니 내 삶의 주변에 이런 역사적 문화유산이 가깝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용궁사는 흥선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왕위 등극을 기원하며 머물면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대원군의 재위 시기를 따져 보면 그전에 불렸던 백운사, 구담사 등으로 영종도 원주민들에게는 더 오랫동안 불려 왔음이 분명하다. 흥선 대원군이 직접 쓴 용궁사 현판이 그대로 걸려 있는데 19세기 조선 시대 후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 때에도 문화 소실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 바로 아래 사찰을 우러르는 느티나무가 운치와 고풍을 더한다. 왼쪽은 할머니 나무, 오른쪽은 할아버지 나무라고 불리는데 나무의 나이도 무려 1,300년 정도로 용궁사와 불멸의 시간을 함께했음을 의미한다. 그 기개와 푸름이 천년 세월 저리 가라 할 정도니 깊은 흙 속에서 굳건하게 용궁사 터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아 보는 내내 경외감이 든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용궁사지만 유구한 세월에 비해 규모도 작고 열악해 보이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 영종도가 예로부터 어업이나 개간지와 방목지를 주 생계수단으로 곤궁한 생활이 이어졌고 고립된 섬의 형태로 불교문화가 크게 전파되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도 용궁사 천 년의 역사가 곧 영종도가 계승하고 이어 온 정신문화 유산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랜 세월, 영겁의 시간 속에 고찰은 어쩌면 천 년의 시간도 예사롭게 말하는 것 같다. 영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불도로 보면 천년은 억분의 1이 되는 수라고 했다. 다시 천 년이 지나 지명과 형세가 바뀌고 세상이 변했어도 백운산 아래 작은 고찰은 여전히 찰나의 시간을 보내며 현생 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든다. 영종도가 존재하는 한 여전히 이 땅에서 건재하며 불심을 초월한 용궁사의 무한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백운사의 돌부처 이야기
용궁사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재담 극 공연이 준비 중이다. 우중충한 날씨에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빗방울이 내심 걱정스러웠지만 이내 경쾌한 사물놀이와 함께 공연이 시작되었다. 용궁사의 지명과 그에 얽힌 민속 설화를 사물놀이 장단에 맞추어 스토리텔링으로 재미나게 풀어 준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몇 번을 물개박수를 치며 실컷 웃었는지 모르겠다.
그 설화를 찬찬히 들어 보면, 옛날 영종도 운목 마을 예단포에 어민 손 씨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연평도로 나가 조기잡이를 했는데 돌부처가 걸려 나와 그만 돌부처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며칠 후 그 바다에서 조기잡이를 하는데 조기는 잡히지 않고 돌부처가 다시 걸려들었다. 이번에도 “재수 없구나!” 하고 돌부처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날 밤이었다. 손 씨의 꿈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 돌부처가 또다시 걸릴 것이니 그 돌부처를 영종도 구읍 태평암에 안치하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니나 다를까 그물을 올리니 과연 그 돌부처가 그물에 걸려 나왔고 꿈의 현몽대로 태평암에 세워 놓았다. 그 후 영종도 방어 영 군졸들이 이 돌부처를 보고는 기이하게 여기고 활로 쏘며 장난을 하였는데 그때 돌부처의 한쪽 팔에는 약병을 들고 있었다. 어떤 연유인지 그 군졸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백운사 주지는 그 돌부처를 절로 옮겨왔고 백운사에는 돌부처에 기도하는 신도들이 매일 수 없이 모여들어 돌부처에 기원하면 모두가 소원 성취하였다고 한다. 이 돌부처가 오래도록 백운사에 안치되었다가 일정 때 주지 김 모가 어느 중에게 팔았다고 전해 올 뿐 행방을 모르고 있다고 했다.
영종도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잠 못 자는 손주들에게 들려줄 법한 이야기다. 백운사는 용궁사의 옛 이름이고, 예단포는 현재까지 이어오는 지명이다. 조선 시대에 영종진이 설치되었으니 태평암과 방어 영 군졸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 온 꽤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사물 장단 패에 맞추어 재미있게 풀어주니 쏙쏙 머리에 잘 박히고 돌부처의 행방이 새삼 궁금해지기도 한다. 백운사 때부터 뿌리내려온 민속 신화는 일제 강점기 시절 가장 처단해야 했을 강력한 주술 신앙의 원천이었기에 돌부처는 진즉 파괴되었음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소원 바윗길에 올라 소원을 기원하다
한바탕 공연을 즐기고 나서 다시 고즈넉해진 산사를 둘러본다.
인천공항 환승객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산사체험 프로그램으로 방문했는지 서너 명의 외국인이 눈에 띈다. 가는 빗줄기 속에서도 가이드가 열심히 관광객들에게 주변의 명소를 가리키며 설명한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흥미롭게 둘러보는 관광객이 있는가 하면 사찰을 배경으로 연신 셀카 삼매경에 빠진 외국인도 보이고 아예 자리에 눌러앉아 휴대폰으로 세상과 소통 중인 사람도 있다. 어디서나 관광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흔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나 또한 이 풍경에 사진 한 장의 배경이 되어 그들과 나의 추억으로 한 장소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함께 누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아이를 동반한 가족과 나이 지긋한 등산객,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 젊은 여자가 눈에 들어와 유심히 지켜보게 된다. 수수한 모습의 채송화 같은 20대 초반의 여자는 곧 법당에 들어와 불경인 듯 주문을 외며 절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도 간절함이 느껴진다. 이어 사찰을 지나 백운산 등반길 초입의 소원 바윗길로 걸어 올라간다. 한참을 기도하는 뒷모습이 간절한 듯 처연하면서도 어쩐지 발랄한 생기가 더 느껴진다.
산자락 아래에서 다시 마주친 그녀와 잠시 이야기 나눌 수 있었는데 간절히 바라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불교 신자인 그녀는 같은 직장에서 교제하다 결별한 남자친구가 있었고 직장에서 마주칠 때마다 괴로웠다고 했다. 그녀는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소원을 빌었다. 딱 그 나이 때 겪을 수 있는 고민과 실연의 아픔이다. 연인의 마음이란 들여다볼 수도 앞도 뒤도 생각할 수 없기에 복잡하고 괴롭기만 하다. 조금 더 인생을 걸어 온 이 선배가 답해 줄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그러나 아는 체는 하지 않았다. 담담히 소원을 말하던 여자의 얼굴은 번민이 사라진 듯 평온해 보였고 이미 소원 성취한 듯 방긋한 미소가 퍽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꼭 불심이 아니어도 영험을 믿지 않더라도 여기 산사에 앉아 있으니 나의 헝클어지고 복잡한 심정도 담백해짐을 느낀다.
그럼, 나도 소원을 말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