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차이의 딜레마 뛰어넘기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 우선 말씀드리자면, 저는 임산부 배려석(임산부석)이 의미가 없다거나 극단적으로 이것은 여성을 위한 특권이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닙니다. 버스나 지하철에 있는 교통약자석(임산부석을 포함한)을 비워두는 것은 분명 약자를 배려하는 일입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더불어 사는 사회의 시민이 갖춰야 할 교양이자 지켜야 할 의무죠. 다만 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보려고 합니다. 임산부석을 비워두는 것만으로 우리는 시민의 의무를 완전히 다 수행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때 ‘오메가패치’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었습니다. 오메가패치는 “지하철, 버스 임산부 좌석에 당당히 앉은 남성들”의 사진을 업로드하여 공개적으로 고발(박제)했죠(2016년에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고 계정은 삭제됐습니다). 한남패치, 워마드패치 등등 불의를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사람의 신상을 공개하여 그 사람에게 불이익이 가도록 하는 ‘○○패치’는 여럿 있었습니다(요즘은 성범죄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한 ‘디지털 교도소’와,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무책임한 아빠들의 신상을 공개한 ‘배드파더스’가 핫하죠).
오메가패치는 사라졌지만, 임산부석에 함부로 앉은 ‘개저씨’와 ‘한남’을 저격하는 글은 지금도 간간이 SNS에서 보입니다. 고발 사진이 올라오고 그 남성들을 욕하는 댓글이 우수수 달리는 와중에, 가끔 ‘저 사람은 왜 욕을 먹어야 할까’ 싶은 사진도 있었습니다. 한 남성이 지하철 임산부석에 앉긴 앉았는데 주변의 다른 ‘일반’석이 텅텅 비어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본래 임산부석을 비워두는 이유는 대중교통에 힘들게 탑승한 임산부가 편안하게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임산부가 누려야 할 이익). 만약 빈자리가 많으면 임산부는 굳이 임산부석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임산부석이 채워져 있더라도 다른 자리 아무데나 편하게 앉으면 되니까요. 즉, 그 남성은 임산부의 이익이 별로 침해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단순히 ‘임산부석에 앉았다’는 사실만으로 욕을 잔뜩 먹었던 것입니다.
‘거꾸로 생각해서, 다른 자리도 많은데 굳이 임산부석에 앉는 저 남성의 저의가 의심스럽다. 임산부석을 차지하는 건 임산부석을 비워두어야 한다는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뜻이다’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실질적 이익이 침해되지 않더라도 ‘상징적’으로 남성이 임산부석에 앉는 것은 문제라는 주장입니다. 흠… 그 남성의 저의를 의심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겨우 사진 한 장으로 정확한 속마음을 파악하기엔 정보가 매우 부족했습니다(극단적으로 말해서 남자처럼 보이는 그 사람이 사실은 임산부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정보가 부족했죠). 그래서 저는 (남들이 마구마구 욕할 때) 판단을 보류하는 댓글을 남겼는데, 욕을 바가지로 처먹었습니다. 냠냠ㅠㅠ. 분위기 파악을 못한 걸까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분위기를 타고 그 남성을 욕하던 사람들은 임산부석을 ‘성역화’했던 것 같습니다. 임산부의 이익이 실질적으로 침해당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남성이(남성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임산부석에 앉음으로써 그 자리의 성스러움이 상징적으로 침범당한 것이죠. 그 자리는 ‘약자’만이 앉을 수 있는, 아무나 함부로 앉아서는 안 되는 자리인데!! 별로 약해 보이지도 않는 ‘일반’인이 자리를 차지하다니!? 저는 여기서 차이의 딜레마가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소수자가 차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억압된 상태에서 해방되어 가시적인 정치적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고 실질적 평등을 쟁취하려는 의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를 강조하는 접근은 기존의 분리된 체제와 낙인을 심화시키거나 유지시킬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 예컨대 장애인을 위한 정책은 장애인에게 불리한 사회구도를 보완하는 기회와 자원을 제공하겠지만, 동시에 장애인이 사회의 지원을 받는 열등한 수급자라는 집단적 낙인을 만들 수도 있다. 집단의 차이를 강조할수록 차별이 고착될 것 같기도 한 ‘차이의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선량한 차별주의자』, 183쪽)
버스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다 보면 독특한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 좌석이 다 차 있고 노약자석만 비어 있는 상황, 한 아주머니께서 탑승하시곤 주위를 둘러보시더니 노약자석에 앉습니다. 잠시 후 다음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고 그 아주머니도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따라서 내리는 게 아니라 자리를 옮깁니다. 노약자석에서 일반석으로! 왜 굳이 불편하게 자리를 바꿨을까요? 저에게는 그 아주머니께서 노약자석에 앉기를 꺼려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비단 그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저는 이렇게 노약자석에서 일반석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빨갛게 칠해진 임산부석을 보면 알 수 있듯, 교통약자석은 대체로 독특한 색깔로 칠해져 다른 좌석과의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일반석과는 확연히 다른 ‘일반적이지 않은(특별한)’ 좌석이 됩니다. 그렇기에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은 자신이 그 자리에 앉을 만한 특별한 사람임을 속으로 정당화하고 겉으로는 증명해야 합니다. ‘나는 노약자다’라고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노약자석에 앉기가 참 불편하겠죠. 게다가 앞서 임산부석에 앉은 한 남성이 욕을 먹었듯이, 겉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않으면 심한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아주머니께서는 편히 앉고는 싶지만 그러한 정당화와 증명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자리를 옮긴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와 관련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심리학실험이 하나 있습니다. 유명한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이 1972년에 수행한 ‘지하철 연구’의 실험인데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빈자리가 없는 지하철에 앉아 있는 아무나에게 가서 “실례합니다만, 제가 앉아서 가면 안 될까요?”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부탁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밀그램은 노약자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고, 한 승객이 자리를 내주자, 놀라운 감정을 경험합니다.
“내가 그 사람의 자리에 앉고 나자 내 요구를 정당화해줄 수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강한 충동이 불끈 솟아올랐습니다. 머리를 무릎 사이에 박았고 핏기가 없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연기를 한 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바로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매드 매드 사이언스 북』, 196~197쪽)
저는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지하철을 탑니다. 사람들을 꾸준히 지켜보니, 대부분 시민의 의무를 잘 지키는 듯합니다. 출근길에 사람이 가득 차도 임산부석만큼은 대체로 비어 있습니다. 허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임산부가(임산부로 추정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면, 이제 빈자리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됩니다.
만약 이 상황에서 지하철에 또 다른 임산부가 탄다면 어떨까요? 저는 앞서 ‘자리가 비어 있어 편하게 앉을 수 있는 것’이 임산부가 누려야 할 이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임산부가 임산부석에’ ‘일반인이 일반석에’ 적절하게 앉음으로써 그 어떤 성스러움도 상징적으로 침범당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임산부의 이익이 침해당한 경우입니다. 텅텅 빈 지하철에서 굳이 임산부석에 앉은 남성의 사례와 정확히 반대됩니다. 자, 이젠 누가 욕을 먹어야 하죠?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까요?
임산부석을 비워두라는 말이 불편해지는 순간은 바로 이런 때입니다. 임산부를 배려하여 임산부석을 비워두어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임산부를 배려하여 ‘임산부석이 아닌 좌석’ 역시나 비워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교통약자를 위해 자리를 비워둘 수 있는 사람들이 그저 마음 편하게 일반석을 차지하고 있을 때, 저는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과연 우리는 시민의 의무를 온전히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거듭 묻게 됩니다.
교통약자석과 일반석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며 교통약자석에 ‘함부로’ 앉은 누군가를 쉽게 손가락질하는 것은 ① 교통약자석에 앉는 사람의 심적 부담(정당화와 증명의 압박)을 늘리며 ② 일반석에 앉은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짊어진 책임을 잊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깨닫고 난 후로 저는 빈자리가 없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설령 자리가 나더라도 바로 가서 앉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앉아도 괜찮은 것인가’ 스스로 정당성을 따져보고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위해 마땅히 비워두어야 하는가’ 하고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죠.
반대로 자리가 널널할 때는 편히 앉아 있다가도 사람이 많이 들어와 빈자리가 없어지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때 요리보고 조리봐도 나보다 더 건강하고 튼튼해 보이는 사람이 제가 일부러 비워둔 자리를 차지하면 좀 허탈해집니다. 나 혼자 이것저것 고민하면서 배려를 실천하려고 해봤자 별 의미는 없구나…. 물론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당신이 여기 왜 앉냐. 임산부냐, 노인이냐, 장애인이냐, 뭐냐’라며 자격 증명을 요구하는 건 무례한 짓이므로 하지 않습니다(또한 오메가패치처럼 몰래 그 사람을 촬영해서 인터넷에 사진을 올린 후 조리돌림하지도 않습니다).
허탈한 경험을 몇 번 겪다 보면, 뭔가를 생각하기도 실천하기도 귀찮아집니다. 지금까지 무슨 도덕적으로 굉장히 엄격한 사람인 것처럼 글을 써놓고서 이런 말을 하기가 좀 부끄럽습니다만, 요즘은 저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자리에 앉아 있을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배려니 뭐니 조금은 귀찮기도 하거니와 가끔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힘들 때면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약자다ㅠㅠ’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이해진 제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줄요약: 교통약자석이든 교통‘강자’석이든 비워두자.
참고자료
「남녀 혐오 ‘워마드ㆍ오메가패치’ 운영자 검거」, <한국일보>, 2016.11.28.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11282015136742
「"임산부 배려석, 꼭 비워둬야 할까요"」, <머니투데이>, 2018.9.2.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8083010313352866
「“임산부석의 개저씨들” 도촬 사진 오메가패치 논란… 페북지기 초이스」, <국민일보>, 2016.7.3.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0752317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2019.
레토 슈나이더, 고은주 옮김, 『매드 매드 사이언스 북』, 뿌리와이파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