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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술북스 Sep 23. 2021

다 읽은 책은 찢어서 버립니다

“책은 책장에 꽂아놓을 때보다 꺼내서 읽을 때 그 가치가 극대화되잖아요.”

유유 출판사의 한 편집자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말 어감 사전』(2021), 『독서모임 꾸리는 법』(2019),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2016) 등등 유유에서 나오는 책을 보면, 표지가 참 단출합니다. 점점 책이 굿즈화되는 시대,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듯 너도나도 삐까뻔쩍하게 책을 디자인하는 와중에, 유유는 작고 가볍고 읽기 편하게 책을 만들어서 눈길이 갑니다. 편집자님께서는 책이 더 쉽게,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고 하시면서, “책에 꼭 필요한 요소에만 집중하는” 유유의 출판 철학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예쁜 책을 보면 소장 욕구가 차오르곤 합니다. 언젠가부터 판형, 종이의 질감, 제본 방식 등 이른바 책의 ‘물성’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읽는 속도보다 사는 속도가 더 빨라지며, 책장에 하나둘 책이 꽂히고, 더이상 공간이 없자 바닥에 나뒹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문득 ‘내가 뭐 하는 짓이지? 나는 왜 책을 ‘모으고’ 앉아 있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책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읽히지 않는 책은 책이 아니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읽히지 않는 책은 그냥 예쁜 종이 쓰레기에 불과하다, 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예쁜 것을 모으는 취미도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면 굳이 ‘책’을 모을 필요가 있나 싶었죠. 점점 집에 공간이 부족하기도 해서, 책을 좀 버리기로 했습니다. 한 번 읽고 책장에 꽂아두고서 두 번 다시 손을 대지 않는 책이 부지기수더라고요.


모아서 중고시장에 팔면 되지 않아? 싶으실 텐데요. 저는 출판 편집자로서, 사명감을 갖고 꾸역꾸역 책을 집필하시는 저자 선생님들께 항상 죄송스럽습니다. 저자에게 ‘기생’해서 편집자로 일하는 나는 200~300만 원씩 꾸준히 월급을 받는데, 정작 책이 잘 팔리지 않아 저자분들이 저작권료로 1년에 200~300만 원을 겨우 챙기는(심지어 그조차도 얻지 못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왔거든요. 중고책이 거래된 만큼 일정량의 저작권료가 저자에게 지급된다면 저도 중고시장에 책을 내놓을 의향이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참고자료로 두고두고 읽을 책, 내가 편집한 책(포트폴리오), 아직 안 읽은 책, 선물로 받은 책 등등을 제외하고 전부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기 전에, 그 물성을 한번 제대로 느껴보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찢어서’ 버리기로 했습니다.


버린 책들

『엘러건트 유니버스』(승산, 2020)
: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양장제본 도서. 초끈이론은 어렵다, 정말.
『싸이월드 감성』(도도봉봉, 2019)
: 오글거려서 좋았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의 감성은 가슴속에 묻어두자.
『스타트업 수난기 시즌 1』(다음엇지, 2021)
: 굳이 책으로 읽을 필요가 있을까? 웹툰으로 봐야지~.
『유사역사학 비판』(역사비평사, 2018)
: 유사과학도 그렇고 유사역사학도 그렇고, 참 고생이 많다.
『낱말 공장 나라』(세용출판, 2009)
: 짜릿해! 새로워! 동화책이 최고야!
『썅년의 미학』, 『썅년의 미학, 플러스』(위즈덤하우스, 2018~2019)
: 보통은 세로로 날씬한 다른 책들과 달리 가로로 넙데데해서 보기 좋다.
『잘 못들었습니다?』(인디펍, 2019)
: 남자나 여자나 군대 가면 다 똑같다.
『빠졌어, 너에게』(문학동네, 2021)
: 주변의 남자 무리가 다 남남(BL) 커플로 보인다.
『엑스맨은 어떻게 돌연변이가 되었을까?』(애플북스, 2019)
: 과학덕후가 쓴 과학책.
『아주 약간의 변화』(유어마인드, 2017)
: 생활감이 느껴지는 에세이 만화. 개좋음.


사실 한 권 한 권 찢으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읽은 정이 있어서 그런지 이 책들에게 조금은 미안해지더라고요. 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작업을 이어가니, 미안하기는 무슨, 쫙쫙 찢는 손맛이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아까워라…. 괜히 지금 버렸다가 나중에 다시 읽고 싶어지면 어떡하냐고요? 그러면 그때 가서 또 사면 되죠! (아니면 도서관을 이용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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