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는 이유는 감정 관리에 실패해서이다

정서 조절

by 사심가득
"그냥 하기 싫어서 안했는데?"


혹자에게 어떤 일을 왜 미루었냐 물으면 가장 많이 듣는 대답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답 안에 미루기의 본질이 숨어 있다.


미루기에는 다양한 심리적 원인이 있다. 실패했을 때 쓸 핑계를 미리 만들어두는 셀프 핸디캐핑, 능력으로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기가치 이론, 나를 긍정적으로 보고 싶은 자기고양 동기, 행동과 믿음의 충돌에서 오는 인지부조화, 그리고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믿는 고정 마인드셋 등.


이 모든 개념의 공통점은 바로 자기 보호 전략이라는 것에 있다. 그런데 한 층 더 들어가면, 더 근본적인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대체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걸까?


가능한 하나의 답은 '감정'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불쾌한' 감정이다.




미루기 = 과제 회피가 아니라 감정 회피

과거에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일을 미루는 이유가 시간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거나 또는 자기 통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플래너를 쓰고, 할 일 목록을 만들고, 마감을 잘게 쪼개면 해결될 문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연구들은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캐나다 칼턴 대학교의 티모시 피칠(Timothy Pychyl) 교수와 캐나다 비숍 대학교의 퓨셔 시로이스(Fuschia Sirois) 교수는 수십 년간 미루기를 연구해왔다. 이들의 결론은 명확하다.


"미루기는 시간 관리 문제가 아니라 감정 조절 문제다."


무슨 뜻일까? 우리가 어떤 일을 미룰 때, 피하는 것은 그 일 자체가 아니다. 그 일을 할 때 느끼는 불쾌한 감정을 피하는 것이다.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미루고 있다고 해보자. 피하는 것은 보고서가 아니다. 보고서를 쓸 때 느끼는 지루함, 막막함, "잘 못 쓰면 어쩌지"라는 불안, "이걸 왜 해야 하지"라는 짜증. 이 감정들이 불쾌하다. 그래서 피한다.


유튜브를 보거나 SNS를 스크롤하면 그 불쾌함이 잠시 사라진다. 기분이 나아진다. 뇌는 이걸 학습한다. "불쾌한 감정 → 딴짓 → 기분 회복." 미루기는 즉각적인 기분 회복 전략인 것이다.




단기 이득, 장기 손해

문제는 이 전략이 단기적으로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시로이스 교수의 2013년 연구를 보자. 그는 미루기와 스트레스의 관계를 조사했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미루는 순간에는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불쾌한 과제를 피했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스트레스가 더 커진다. 마감은 다가오고, 일은 그대로 쌓여 있고, 거기에 "또 미뤘다"는 자책까지 더해진다.


미루기는 신용카드와 같다. 지금 당장 기분이라는 돈을 빌려 쓴다. 잠깐은 좋다. 그러나 이자가 붙는다. 나중에 갚아야 할 감정적 부채는 원금보다 커진다. 불안, 죄책감, 자기혐오. 이 이자들이 쌓이면 다음 과제는 더 미루고 싶어진다. 악순환이다.




감정이 먼저다

그래서 미루기를 해결하려면 시간 관리 기술보다 먼저 봐야 할 것이 있다. 감정이다.

"왜 이 일을 미루고 있지?"라고 물을 때,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이 일을 할 때 어떤 감정이 들길래, 이렇게까지 미루고 싶은 거지?"


지루함일 수 있다. 막막함일 수 있다. 실패에 대한 불안일 수 있다.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압박일 수 있다. 또는 "이걸 왜 내가 해야 하지"라는 분노일 수도 있다.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은 메타인지, 즉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의 연장선이다. 다만 이번에는 생각이 아니라 감정을 관찰하는 것이다. "아, 내가 지금 이 감정을 피하려고 미루고 있구나."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번 챕터에서 다룰 것들

앞으로의 글에서는 미루기와 감정의 관계를 깊이 파고들 것이다.


먼저, 미루기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감정인 '불안'을 살펴본다. 왜 중요한 일일수록 손이 안 갈까? 심리학자 히긴스의 이론을 통해 불안의 뿌리를 이해한다.


다음으로, 완벽주의를 다룬다. "제대로 못 할 바에야 안 한다"는 생각이 어떻게 미루기로 이어지는지, 완벽주의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아본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쓰는 대응 방식의 문제를 본다. 특히 자책이 왜 동기부여가 안 되는지, 어떻게 미루기를 강화하는지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대안을 제시한다. 스스로에게 친절해지는 자기자비, 그리고 내 문제를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는 자기 거리두기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돌보는 방법들이다.


미루기가 감정 문제라면, 해결책도 감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참고문헌

Pychyl, T. A., & Sirois, F. M. (2016). Procrastination, emotion regulation, and well-being. In F. M. Sirois & T. A. Pychyl (Eds.), Procrastination, health, and well-being (pp. 163–188). Academic Press.

Sirois, F. M., & Pychyl, T. A. (2013). Procrastination and the priority of short-term mood regulation: Consequences for future self. Social and Personality Psychology Compass, 7(2), 115–127.

Tice, D. M., & Bratslavsky, E. (2000). Giving in to feel good: The place of emotion regulation in the context of general self-control. Psychological Inquiry, 11(3), 149–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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