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다음편은 쉬운데 보고서 쓰기는 어렵다

마찰 줄이기의 심리학

by 사심가득

넷플릭스를 켠다. 시리즈 한 편이 끝난다. 5초 뒤 다음 편이 자동으로 재생된다.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침대에 누워 있으면 된다. 그렇게 세 편, 네 편을 연달아 본다. "한 편만 더"를 세 번 반복한다. 어느새 두 시간이 지나 있다.


이제 노트북을 켠다. 보고서를 써야 한다. 파일을 찾는다. 어디까지 했는지 확인한다. 뭘 먼저 써야 할지 생각한다. 자료를 열어본다. 아, 그전에 이메일부터 확인해야 하나. 잠깐 카카오톡도 본다. 어느새 30분이 지나 있고, 보고서는 한 줄도 늘지 않았다.


같은 사람이다. 같은 날이다. 그런데 한 켠에는 아무런 노력 없이 두 시간을 쏟고, 다른 한켠에는 30분이 지나도 시작조차 못 한다. 이 차이는 의지력의 문제일까?


아니다. '마찰(friction)'의 차이다.




행동 실천율을 3%에서 28%로 바꾼 비결

마찰이란 행동까지 도달하는 데 필요한 단계, 노력, 결정의 총량을 의미한다. 실행 단계가 많을수록 마찰이 높고, 행동할 확률이 떨어진다. 반면, 단계가 적을수록 마찰이 낮고, 행동할 확률이 올라간다.


이 원리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연구가 있다. 예일 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하워드 레벤탈(Howard Leventhal)과 동료들은 대학교 4학년생들에게 파상풍 예방접종의 중요성을 알리는 책자를 나눠줬다. 파상풍이 얼마나 위험한지, 예방접종이 왜 필요한지, 학교 보건센터에서 무료로 맞을 수 있다는 것까지 전부 담긴 7쪽짜리 자료였다.


학생들의 반응은 좋았다. 파상풍의 위험성을 이해했고, 예방접종이 중요하다고 동의했고, 접종을 받겠다는 의향도 높았다. 그런데 한 달 뒤 실제로 접종을 받은 학생은 고작 3.3%였다.


이상한 일이다. 위험성을 알고 있고, 필요성에 동의하고, 하겠다는 의향까지 있는데, 왜 안 했을까? 의지가 약해서? 게을러서? 파상풍이 별로 무섭지 않아서?


레벤탈은 한 가지를 바꿔봤다. 책자에 보건센터의 위치가 표시된 캠퍼스 지도를 넣고, 접종 가능한 시간표를 추가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언제 가면 좋을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게 했다.


접종률이 28%로 뛰었다. 3.3%에서 28%. 무려 8.5배 높아졌다!


학생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준 게 아니다. 보건센터가 어디 있는지 4학년생이 모를 리 없었다. 바뀐 건 단 하나, 행동까지의 단계가 줄어든 것이다. "접종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보건센터에 간다"는 행동 사이에 있던 마찰, 즉 "어디로 가지?", "언제 가지?", "시간이 있나?"라는 결정의 단계들이 사라진 것이다.




넷플릭스가 마찰을 낮추는 원리

이 원리를 가장 정교하게 활용하는 곳이 넷플릭스다.


넷플릭스의 자동 재생을 마찰의 관점에서 분석해 보면 이렇다. 자동 재생이 없다면, 한 편이 끝난 뒤 다음 편을 보려면 여러 단계가 필요하다. 마우스나 리모컨을 잡는다 → 다음 편을 찾는다 → 재생 버튼을 누른다. 세 단계. 이 세 단계 중 아무 곳에서나 "이제 그만 볼까"라는 생각이 끼어들 수 있다.


그런데 자동 재생 기능이 이 모든 단계를 없앤다. 다음 편을 보는 데 필요한 행동은 "아무것도 안 하기"다. 반대로 시청을 멈추려면 능동적으로 버튼을 눌러야 한다. 넷플릭스는 "계속 보기"의 마찰을 0으로 만들고, "그만 보기"의 마찰을 높인 것이다.


이제 보고서 쓰는 장면으로 가 보자. 보고서를 시작하려면 몇 단계가 필요할까?

1. 노트북을 연다.

2. 작업하던 워드, 한글 등 파일을 찾는다.

3. 파일을 열고 기다린다.

4. 어디까지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본다.

5. 오늘 뭘 쓸지 결정한다.

6. 쓰기 시작한다.


이렇게만 해도 여섯 단계다. 각 단계마다 "그냥 나중에 하자"는 생각이 끼어들 틈이 있다. 여섯 번의 탈출 기회가 있는 셈이다.


넷플릭스가 쉽고 보고서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지력의 차이가 아니라 마찰 개수의 차이다. 단순히 계산해도 넷플릭스는 마찰이 0이고, 보고서는 마찰이 6이다.




기본값을 바꿔라

행동경제학에서는 이것을 기본값(default)이라고 부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일어나는 것이 기본값이다. 넷플릭스의 기본값은 "다음 편 재생"이다. 보고서의 기본값은 "시작 안 한 상태"이다. 그런데 기본값은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다.


그래서 미루기를 줄이려면, 일을 시작하는 것의 기본값을 바꿔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작까지의 단계를 줄이고, 가능하면 아무것도 안 해도 시작되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퇴근하기 전에 내일의 시작을 세팅해 둔다. 파일을 열어 둔 채로 퇴근한다. 이때 내일 첫 번째로 쓸 문장의 시작을 적어 둔다. 다음 날 출근해서 노트북을 열면, "뭘 해야 하지?"라는 결정 단계가 사라진다. 파일이 이미 열려 있고, 커서가 이미 깜빡이고 있다. 시작의 마찰이 6에서 1로 줄어든다.


둘째, 스마트폰을 물리적으로 분리한다. "집중하자"고 다짐하면서 스마트폰을 책상 위에 두는 건, 다이어트를 하면서 부엌 식탁에 맛있어 보이는 에그타르트를 놓아두는 것과 같다. 스마트폰이 눈에 보이면,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고, 그 충동에 저항하는 데 의지력이 소모된다. 다른 방에 두거나, 서랍에 넣거나, 가방 안에 넣는 것만으로 "확인하기"의 마찰이 올라간다. 마찰이 올라가면 충동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빈도가 줄어든다.


셋째, 작업 환경을 단일화한다. 브라우저에 탭이 20개 열려 있으면, 각 탭이 주의를 끄는 유혹이 된다. 작업에 필요한 탭만 남기고 나머지를 닫는다. 작업용 브라우저 프로필을 따로 만들어서, 업무 시간에는 소셜 미디어가 로그인되어 있지 않은 환경을 기본값으로 세팅한다.




의지력이 낮은 것에 실망하지 말고 환경을 설계하라

레벤탈의 예방접종 연구가 보여주는 교훈은 단순하다.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동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동기와 행동 사이에 마찰이 있기 때문이다. 마찰을 줄이면 동기가 행동으로 이어진다.


미루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해야 한다"에서 "한다" 사이에 너무 많은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 단계마다 "그냥 나중에 하지 뭐"가 끼어든다.


넷플릭스는 우리가 계속 보게 만드는 환경을 정교하게 설계해 놓았다. 이를 벤치마킹해서 우리도 해야 하는 일들에 같은 원리를 쓸 수 있다. 즉, 미루고 싶은 일의 마찰은 줄이고, 미루게 만드는 유혹의 마찰은 키워야 한다.


의지력이 낮은 나에게 실망하거나 자책하지 말고, 의지력이 필요 없는 환경을 세팅해야 한다. 이 사회 심리학의 지혜가 바로 넷플릭스는 알지만 우리는 몰랐던 것이다.




참고문헌

Leventhal, H., Singer, R., & Jones, S. (1965). Effects of fear and specificity of recommendation upon attitudes and behavior.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2(1), 20–29.

Lewin, K. (1951). Field theory in social science: Selected theoretical papers. Harper & Brothers.

Thaler, R. H., & Sunstein, C. R. (2008). Nudge: Improving decisions about health, wealth, and happiness. Yale University Press.

이전 20화시작이 전부다. 일단 5분만 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