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TV를 통해 보는 그를 좋아하지만-외모도 내 취향이다- 단 한 번도 그의 책을 읽지 않았다. 그리고 특히 이번에 출간된 <살고 싶다는 농담>은 더더욱 읽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거란 건 제목만 봐도 뻔했고, 나는 삼여 년간 우울증을 앓아오다 육 개월 전부터 정신과에 다니고 있는, 그리고 언제든 스스로 삶을 놓을 수 있다는 걸 불과 몇 주 전에 인정하게 된 ‘중등도 우울에피소드 및 혼합형 불안장애’ 환자다. 불과 몇 주 전에도 가진 약을 다 먹으면 죽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사람. 약에 의지하거나 중독되는 게 싫어 최소한의 약만 먹고 버티다가 결국엔 아침마다 다섯 종류의 약 일곱 알을 삼키게 된 사람. 살아있는 동안은 무기력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약에 의지하고 중독되는 것을 각오한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책을 빌린 사람은 동생이었다. 며칠 뒤 동생은 책을 돌려주며 자신과는 안 맞더란 이야기를 했다. 그때 어렴풋이 이 책과 나의 궁합이 찰떡이겠구나란 생각을 했다. 동생과 나는 책 취향이 상극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읽기를 오랫동안 미뤘다. 혹시나 책을 읽고 내가 무너질까 두려웠다. 특히나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무렵 나는 약 복용량과 종류를 갑자기 늘려야 했을 만큼 또 한 차례 한계가 온 상태였다. 하지만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살고 싶다는 농담>을 집어 들었다. 아이패드에서는 빗소리와 함께 차분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근래 보기 드물게 독서에 차분하게 몰두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을 아주 오래 전부터 해왔다. 다음 생에는 바위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저 여성인권이 형편없고, 반복되는 내전과 가난으로 태어날 때부터 불행을 짊어진 이들보다 나은 축에 속한다는 걸 감사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철없이 마냥 해맑고 천방지축으로 살아가던 시절을 보낸 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꿈을 위해 바쁘게 살아가며 현재의 삶이 행복하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것을 봤다. 회사를 다니는 게 만족스럽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갑작스레 퇴사를 결정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삶은 터지기 직전의 마지막 발악이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인간으로 태어나 생을 이어가는 동물적인 욕구 이상을 추구해야 하는 삶은 역시 불행하다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갑자기 바위가 될 수도 없고, 패리스 힐튼의 반려동물이 될 수도 없고, 대기업인 에버랜드에 사는 팔자 좋아 보이는 라쿤이 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인간으로 태어났고,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주어진 수명의 절반 정도를 살아버렸다. 그래 인간으로 태어난 김에 답을 찾아보자. 그래서 나는 왜 살아야 하는 건데?
가장 쉬운 답변은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라는 말이었다. 이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태반은 그렇게 살다 지쳐버린 사람들일 텐데 그리 말한다면 당장 목을 매어버리지 않을까. 이건 정답이 아니다. 초점을 나에 두고 나를 위해 살 수 있는 방법과 용기,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게 이들에게 필요하다. 정신과에 가면 간혹 산파술을 이용해 모순된 생각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겠다고 환자의 감정을 불쾌하게 만드는 의사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의사를 만났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시비 거는 거냐며 화를 낸다고 하는데 당시 나는 기력이 소진해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라고 답해 토론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환자가 의사를 해결사로 생각하거나 의존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환자가 의사와 철학적 토론을 하러 정신과 병원에 어려운 걸음을 한 것 또한 아니다. 산파술을 실제 겪으면서 절실한 심정으로 정신과에 갔던 환자들이 왜 치료 도중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지 알 것 같았다. 혼자 해결하지 못해 찾아간 곳에서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질문들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면 위축되거나 좌절하게 된다. 아, 정말 나는 답이 없구나. 차라리 화를 내는 건 안전한 반응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신과에서 사용되는 산파술을 반대한다.
타인을 위해 살라는 말도, 내 안의 모순된 논리를 해결해야 한다는 말도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한다. 도서관에서 잔뜩 빌려오는 책들은 각기 장르도 다르고,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기 위한 자료들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은 시작부터 “살아라.”라고 말한다. 고통스러운 죽음의 문턱을 넘어왔고, 재발하면 항암치료를 다시 받지 않겠다고 결심한,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쓴 글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장황한 설명과 수식을 붙인 어떤 글보다 그의 글이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이 되어주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치료 초반 죽으면 편하겠다고 했던 상태에서 호전되던 중에 다시 급하게 상태가 나빠졌다. 자살을 생각하는 스스로를 위험하다고 판단해 다음날 바로 병원에 가서 상담을 하고 다량의 약을 처방 받았다. 매일 아침 약을 먹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는 게 지겹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이전과 동일한 분량의 약을 먹어도 상태가 좋아지지 않는 날이 계속 이어졌다. 급기야 남은 약을 다 먹으면 죽을 수 있을까란 생각을 했다. 시도하지 않은 이유의 절반은 다 먹어도 안 죽을 거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당분간 더 살아야 하는데 살아있는 동안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신기한 건 어차피 죽을 거 막 살겠다가 아니라 죽기 전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나의 답은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었던 일을 다 마치지 못했다, 가 될 것이다.
아직 읽지 못한 책들, 정리하지 못한 책들이 잔뜩 쌓여 있다. 글을 지어먹는 사람이 되고 싶다, 조악한 그림으로 근근이 먹고 사는 그림쟁이가 되고 싶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하얀 티에 헐렁한 청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를 달리고 싶다. 지금 하는 초보 명상, 요가, 근력운동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다. 일방적으로 맡겨진 조카를 돌보느라 지나쳐버린 몇 달을 보상 받을 수는 없지만, 투쟁으로 얻은 자유시간을 마음껏 활용해 하고 싶은 일들로 잔뜩 채우며 살아보고 싶다. 날이 따뜻해지면 서울을 떠나 새롭게 정착한 이 도시의 여기저기를 내 발로 돌아보며 구석구석에 새겨진 이야기를 듣고 싶다. 아침 일찍 문 연 카페에 가서 음악을 즐기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싶다.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 싫어 안경을 쓰고 꾸미지도 않고 대충 살아가며 나다운 걸 잃어버렸던 삶을 그만두고 남이 뭐라고 하든 말든 나답게 살아보고 싶다. 몇 년째 늘어진 채인 뱃살에 복근을 선물해주고 싶다. 염을 할 때 복근 있는 몸이라니 참 멋지지 않은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그간 떠오르지 않던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아이디어가 샘솟듯이 뿜뿜 쏟아진다.
저자 허지웅은 <살고 싶다는 농담>을 자신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청년들이 똑같이 겪지 않기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그의 나이가 정확히 몇인지 모르겠다. 나보다 조금 많은 정도였던 것 같다. 아직 젊은 그가, 청년인 그가 그보다 어린 청년들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살아있는 날을 할애해 한 권의 책을 낸 것이다. 참으로 찬란한 유물이다. 나도 이런 유물을 남길 수 있을까. 그보다 그가 생각하는 어린 청년들이 이 책을 읽을까, 읽는다면 그의 뜻을 알까.
그에게 무수히 쏟아지는 인생에 대한 고민을 담은 메시지를 감당하지 못해 최근 그는 사서함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루 종일 읽고 답을 해도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메시지가 그에게 왔다. 한때 누군가들의 고민상담자였던 경험을 조금 돌이켜보며 압도적인 양의 슬픔과 고통의 메시지를 감내해야 했던 그에게 연민이 생겼다. 나는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혹자는 타인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 된다고 하는데, 나는 타인의 불행에 깊이 공감해 함께 괴로워지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고민상담은 잘했지만 그때마다 스스로를 갉아먹어 그쪽으로 진로를 바꿔보라는 여러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업으로 삼지 않는 지금도 감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들이 나에게 고민을 상담해왔으니 말이다. 여러모로 나는 살기 위해 세상과 단절될 필요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사서함을 만들었다는 말에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떠올린 건 그의 무거운 의무감에 대한 공감을 가볍게 해주었다. 그 순간 그는 익명으로 온 편지에 대한 답을 쓰기 위해 새벽마다 골몰하는 나미야 잡화점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참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지 않은가. 아프기 전과 후에 그는 다른 사람이 됐다고 말한다. 살인사건과 관련한 추리소설을 쓰던 히가시노 게이고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쓴 것은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끔찍한 재앙 이후였다. 인생에서 커다란 일을 겪게 되면 사람은 성장하게 되기 마련인가 보다. <가면산장 살인사건>을 읽은 뒤 딱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을 읽을 계획이 없었던 나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은 뒤 그의 다른 작품들에 다시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살고 싶다는 농담>이라는 책이 내게 주는 매력에도 불구하고 허지웅의 앞선 책들은 읽기가 주저된다. 그러니 부디 그가 오래토록 살아남아 계속 해서 신간을 내주기를 바란다. 이전 작들은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질 때, 그때서야 마지못해 펼쳐보며 예전엔 이런 생각을 하던 사람이었군, 이라고 곱씹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참 이상한 일이다. 스스로는 오래 살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누군가는 오래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라는 것 말이다. 딱 육십까지만 살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병에 걸리면 연명치료는 받지 않고 순리대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모님의 나이가 어느새 육십을 넘겼다. 육십. 죽기엔 너무 젋은 나이 아닌가. 대상을 내가 아닌 부모님으로 치환하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모님의 마지막 순간에 부모님이 원한 대로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의사에게 말할 수 있을까. 외할머니의 언어장애와 반신마비가 영구적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의사의 말에도 꺽꺽대며 울었던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가 육십쯤에 죽었으면 한다는 말이 어르신들 사이에 유머처럼 돌아다닌다. 더 오래 살면 많이 쓰고 가니까 적게 쓰고 가란 의미란다. 나는 이렇게 소름끼치고 끔찍한 도시괴담을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위로는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자식세대를 키워내야 했던 장년 세대의 고단했던 삶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농담이라고 해도 너무 잔인하다.
결국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생(生)과 사(死) 아닐까. 좋아했던 가수가 몇 년간 어머니를 설득해서야 타투를 하기 시작했던 때가 떠오른다. 무교였던 그의 장례가 어머니의 종교인 기독교식으로 치러졌던 것을 기억한다. 살다보니 가장이 됐고, 나보다 가족을 위해 살았고, 그렇게 자신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잊어버렸던 그의 시작과 끝을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 아니겠는가. 부모의 행복을 위해 태어나 남은 자들이 위로 받고 싶은 대로 죽는다. 그것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