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탓인지 11월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가 이어진다 했다. 12월을 앞두자 개학 전날 밀린 방학숙제를 해치우듯 한파가 덜컥 다가왔다. 허술한 내 몸뚱이는 갑작스러운 온도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인후염과 오한을 뱉어냈다.
토요일에 내과에 갈 요량이었다. 검색해 보니 아파트 상가 내과는 열 시 반에 연다고 했다. 좀 늦다 싶었지만 제일 가까운 곳이니 시간에 맞춰 가기로 했다.
"선생님이 열한 시 반쯤에 오시니까 거기에 이름 적고 가세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직원이 높낮이 차이가 별로 없는 어조로 안내했다.
"인터넷에는 열 시 반으로 되어 있던데요. 집에 갔다가 한 시간 뒤에 또 오란 말인가요?"
"저희는 원래 그래요. 다 이 아파트 사시는 분들이 오는 거라."
카운터 위 노트에는 이미 네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일단 그 밑에 내 이름을 적고 나왔다. 혹시나 해서 큰길 건너 새로 생긴 아파트 상가에 가보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내과 전화번호를 검색해서 전화하니 9시에 이미 열었다고 했다.
새 아파트 상가는 모든 것이 반짝반짝했다. 외관은 유리로 되어 아침 햇살이 빈틈없이 실내를 비췄다. 벽과 바닥은 흠집하나 없이 매끈했다. 새 건물 특유의 페인트 냄새도 살짝 났다.
십오 년 된 우리 아파트 상가와 여러모로 비교됐다. 당시 유행인지 대리석무늬와 짙은 색을 주조로 했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채 착실하게 낡아가고 있었고 여기저기 손때와 발때가 져 있었다. 어딜 가든 은은하게 곰팡이 냄새가 났다.
신축 상가 삼층에 위치한 내과 입구에는 개업을 축하하는 화환이 몇 개 놓여 있었다. 흰색을 주조로 한 인테리어는 내 미래보다 밝아보였다. 카운터에는 직원이 세명이나 앉아 있었음에도 왼쪽의 키오스크를 이용하라고 안내했다. 사무적이지만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절묘한 선을 지켰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위쪽에 설치된 스크린에 내 이름이 호명됐다. 의사는 일회용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눈가 피부의 팽팽함 정도와 말투로 봤을 때 삼십 대 후반으로 보였다. 내 증상을 듣고는 꼼꼼하게 처방을 내려줬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을 거 같았다.
병원에서 발급한 처방전을 들고 바로 옆에 있는 약국으로 갔다.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약사는 약의 복용 방법을 세세히 설명해 줬다. 나올 때 보니 3층에만 약국이 두 개, 2층에도 한 개, 1층에도 한 개 있었다.
신축 상가에 개업하면 바닥부터 시작하는 셈이다. 경쟁자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최신설비를 들이고 깔끔하게 인테리어를 한다. 환자에게 친절해야 함은 기본이다.
반면 우리 아파트 상가 내과가 불친절해도 되는 비결은 세월의 축적이다. 십여 년 영업한 덕에 단골이 많을 테다. 그들은 일찍 와서 이름을 적어놓고 병원에 한 번 더 행차하는 게 익숙하다. 계속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새삼 다른 내과에 가려해도 알아보기도 귀찮고 더 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치관이라던가 이런저런 입력이 한번 들어가면 두뇌는 효율성을 위해 두 번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나이가 들수록 변화는 두렵고 익숙함에 기대게 된다. 기득권을 가지게 되면 하던 대로 해도 저항에 부딪힐 일이 별로 없다. 그게 자기가 옳다는 반증은 아니다. 다들 눈감아주고 있을 뿐.
컴퓨터 프로그램은 버그를 고치고 신기술을 반영해서 계속 업데이트된다. 세상은 계속 변하기 마련이다. 입력 당시에는 맞는 말도 지금 기준으론 아닐 수 있다. 때때로 사람도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 그게 귀찮으면 고루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억울해하면 안될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