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농사
9월에는 농사를 지어야겠습니다
이제는 가을이 찾아올 시간
들판에는 여름내 장맛비와 늦여름의 태풍을 견디어 낸
쌀알을 머금은 벼들이 고개숙여 익어가고
피우고 저버린 꽃 뒤로 바람을 이겨낸 열매가 결실을 맺습니다
우리네 세상 한 해는 이토록 아름답게
틔우고 피우고 져내리며 흘러가는 동안
나는 아직 물 한모금 얻어마시지 못한 메마른 씨앗만
황야에 가득히 뿌려두었습니다
그래서 9월에는 농사를 지어야겠습니다
늦었다고 생각되었을 때가 정말 늦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맘에 너무 와닿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장갑에 두 손을 채워넣고
호미 한 자루 녹을 털어내 황야로 나가보아야겠습니다
올해는 비가 참 많이도 왔습니다. 지금도 태풍이 몰고온 비가 내리고 있는 자정의 늦은밤이지요. 코로나사태로 조심스런 와중에 비까지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쳐버리고 있습니다. 나비효과처럼 아주 조그마한 일이 큰 영향을 미치듯 혹 이런 세상의 분위기가 우리를 헤어지게 하는데에도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까 엄한 원망을 해봅니다.
당신과 헤어지고 많이도 피폐해졌습니다. 너무 늦지 않게 한번은 찾아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지키기에 나라는 사람은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점점 숨 쉬지 못한 채 헛된 헤엄을 치고만 있는 가련한 신세로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바스러져가는 동안 또 다시 어쩌면 잘못 선택한 내 삶의 과거들을 곱씹어 보았더랬지요.
허울뿐인 청년사업가가 아닌 평범한 직장인이었다면 틀에 박힌 일상에 투덜거리고 불평하며 답답해 할지언정 당신을 잃어버릴 실수따위는 하지 않았을텐데.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대기업이란 곳을 가더라도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 불안함이라고 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막연한 두려움일 뿐이고 어디든 그 사람의 직장을 이름 앞에 붙이며 성실하고 안정적인 사람으로 보아주었겠지요. 당신도 당신의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봐주었을텐데 말이에요.
정말 온종일 당신의 연락만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도저히 평범하게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 하루종일 담배를 피워대기도 했습니다. 텅 비어버린 일상이 아픔과 우울로만 가득채워저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에게 버티기 힘든 하루가 아니라 얼마나 남았을지 모를 앞날들은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도 목을 죄이며 걱정되기 시작했지요. 아름답지 못한 늙어버린 베르테르가 되어버린 기분입니다. 문학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비극적 사랑과 비극적 결말이 정해진 그의 종말이 나의 마지막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아버렸습니다.
되려 결말을 알고나니 시시해져버립니다. 언젠가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은 정말이지 포기하고 이미 당신과의 헤어짐에서 말했듯 나의 비극에서 당신을 멀리 떨어뜨려놓아야만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나의 숙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시해저버리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습니다. 모든것을 저버리는 선택이 나에게 남아있다는 희망의 불빛을 발견한 것이랄까요?
누군가의 조언으로 속세를 떠나 출가를 하는 삶도 알아보았습니다. 어린날의 목표처럼 어느 조용한 들판이나 무인도에서 조용히 홀로 눈을 감는 것도 여전히 마음속에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죄진것이 많고 빚진것이 많아 해야할 것들이 남아있음을 다시 상기시켜봅니다.
'하드디스크는 지우셨나요?'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의 어느 자살바위에 쓰인 이 문구처럼 정리해야 할것이 단순했다면 참 좋았을텐데 나라는 사람은 살아온 복잡한 인생처럼 정리해야 할 것들도 복잡하기가 그지 없어 요즘은 앞으로 해야할 남은 정리들을 모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나의 마음을 글로써 남기는 것도 포함이 되지요.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농사를 지금 9월이 되어서야 시작해보렵니다. 수의를 입듯 나의 영혼을 갈무리하고 나의 사람들이 나와의 헤어짐을 당연하게 여기도록하는 작은 텃밭을 가꾸어보렵니다. 작은 논이나 과수원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쌀알이든 빨간 사과든 냉장고에 얼려보관해둘 대파줄기든 들뜬 맘으로 키워낸 아이들을 거두어 여기저기 알음알음 나눠주고 다시 빈 땅. 비어버린 황야로 만들도록 주섬주섬 농사 도구들을 챙기러 나는 떠나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