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한 채로 시작된 봄

by 수미

코를 시리게 만드는 우풍 때문에

겨울 내내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잤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슬그머니 목 언저리로 이불이 내려온다.

3월이란걸

이불이 먼저 눈치챈 모양이다.


우리 집은 아파트 저층이다.

게다가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오래된 집.

창문을 열면 나뭇가지들이

까꿍, 하고 얼굴을 들이미는

가끔은 이름모를 새들도 창문앞에서 떠들고 있는 집.

그래서 겨울이면

집이 더 어둡게 느껴지지만

반대로 여름에는

빼곡한 나뭇잎이 창문을 가려

자연스러운 그늘이 만들어진다.

창문을 활짝 열어 맞바람이 들면

작은 집 안에도

거짓말 조금 보태

돌풍이 불기도 한다.


봄날.

그래, 봄날이다.

어떤 곳은 벌써 벚꽃이 폈다는데

나는

보풀 일어난 이불이

코끝에서 목으로 내려온 걸로

봄을 느끼고 있다.


이불을 빨아야겠다.

우리집 강아지 깨비가 묻혀놓은 털도 털어내고

겨울 내내 묻어 있던

내 살냄새도 씻어내야겠다.

좁은 세탁실에 몸을 구겨 넣고

커다란 이불도 세탁기에 꾹꾹 밀어 넣는다.

세제를 붓고

그저께 산 섬유유연제도

좋은 향 나라고 한 번 더 부어 본다.


웅, 웅.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에 맞춰

설거지도 하고

집 안도 정리한다.

냉장고 아래 눌어붙은 찌꺼기,

쇼파 틈 사이로 얽힌 머리카락까지


삐삐.

세탁이 끝났다는 소리.

물 잔뜩 머금은 겨울 이불을

온 힘을 다해 끌어내

베란다 창문 활짝 열고

봄바람에 널어본다.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손바닥을 한 번 탁 치고

나는 일터로 나간다.


해가 지고 집으로 돌아오니

싸구려 섬유유연제 향기가

작은 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어 보니

보풀이 꽤 많이 올라왔다.

몇 해를 쓴 이불이라

한쪽은 실밥도 풀려 있다.

받짇고리를 꺼내

한 땀 한 땀 기워 둔다.


봄이불을 꺼내려고 장을 열어보니

친정엄마가 사다 놓은 이불들뿐이다.

색이 바랜 것도 있고

헤진 것도 있고

꽃무늬도 제각각이다.

상큼한 봄이라기보다는

정신없는 꽃밭 같다.


몇 해 전 나무가 된 엄마가 두고 간 이불

나는 요즘

한 채씩 정리하고 있다.

아직은

다 보내지 못한 이불이 몇 개 남아 있다.

오늘도

그중 한 채를 꺼내

한참을 안고 있다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듯

휴대폰을 켜 이불을 고르기 시작한다.

봄이니까

핑크가 좋겠다.

고생하는 서방도

봄 냄새 좀 맡게 해줘야지.

몇 년 동안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하던 이불들을

다시 하나씩 들여다본다.

쿠폰도 챙기고

포인트도 계산도 하고

결국

질러 버렸다.


이번 주말이면

새 이불이 올 것이다.

꽃무늬도 아니고

헤진 곳도 없고

엄마 냄새도 없겠지만

그래도

포근하게 덮고

이 봄을

잘 살아 보겠다.


엄마.

이렇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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