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좋아하는 아이가 사라지는 이유

by 수미

한국에서 미술은 늘 뒷줄이다.

영어와 수학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그림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시험기간이라도 겹치면 미술수업은 자연스럽게 자습이 된다.

중고등학생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그림은 언제 허락되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허락’이라는 말이 필요한 걸까.

나는 베트남에서 13년을 살았다.

그 시간 동안 교민과 외국인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그곳에서 오래 남은 것은

아이들이 그림을 배우러 오는 이유였다.


유치부보다 고학년과 십대가 많았던 화실.

한국에서는 수행평가와 대회를 위한 그림을 그리던 아이들을 지도해왔던 나에게

그곳 아이들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점수를 따는 것도 아닌데,

공부량이 늘어나는 시기에

왜 굳이 그림일까.


카이스트 진학을 앞둔 고등학생이 있었다.

주말마다 화실에 와 수채화를 그리던 아이에게 물었다.

“지금 그림 그릴 시간이 있어?”

그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주말에 잠깐 하는 건데요. 머리도 좀 쉬어야죠.”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내가 머쓱해졌다.

그 아이는 유독 천천히 그림을 완성했다.

팔레트 위에서 물과 물감이 섞이고

색이 번지는 순간을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중학생 소녀는 피카소의 작품을 보다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 화풍으로 표현해보고 싶다 했다.

몇 주에 걸쳐 완성된 그림에는

그 아이만의 방식과 시간이 고스란히 담겼다.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이유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쉬고,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십여 년의 베트남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화실을 연 지 3년이 되어간다.

이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비슷한 환경 속에서도 서로 다른 조건을 안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 엄마가 수업료 냈어요?”

순간 당황스러웠다.

수업료는 늘 부모와 나누는 이야기였기에

아이가 직접 묻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유를 묻자 아이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제가 영어 숙제를 안 해서 곧 미술을 끊는다고 했어요.”


그 아이에게 미술은

공부를 했을 때만 허락되는 보상이었다.

조건이 반복될수록 아이의 태도는 달라졌다.

호기심 어린 질문은 사라졌고

“어차피 곧 끊을 건데요”라는 말이 자주 돌아왔다.

수업료를 앞둔 날이면

서둘러 다른 작업을 이어 하자고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의 수업은 문자 한 통으로 끝이 났다.

마지막 인사도 없이.


누군가는 스스로 선택한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무엇을 해냈을 때만 그림을 허락받는다.

같은 시간의 그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누리는 시간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조건이 된다.


나는 아이 안에 작은 불씨가 있다고 믿는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

숨차게 달리고 싶은 마음.

각자 다른 불씨를 품고 있다.

하지만 그 불씨는

조건 속에서만 허락될 때

쉽게 꺼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그림은 언제 허락되는 것일까.

아니,

정말로 ‘허락’이 필요한 것일까.


어떤 아이에게 그림은 쉼이었고

어떤 아이에게 그림은 조건이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이에게 있지 않다.


이 글에 등장하는 사례는 여러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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