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민크루 Jul 19. 2021

카드게임이냐 출항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크루즈 승무원의 일상 <컴플레인 편 ep. 2>

 

예기치 못했던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서 회사원이라는 포지션에 있으면서, 나의 5년 전 Career Plan, 그리고 지금의 Life Plan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배와 육지, 각각의 장단점을 생각하게 되면서 배에서 만난 승객들에 대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동시에 온갖 핑계로 반년 이상 글을 쓰지 않은 것이 무척이나 찔리더랬다.






지금까지는 오랜만에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주절거림이다. 진짜 풀고 싶은 이야기는..


여권 아줌마


당시에도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그 승객은 여행자로서는 책임감이 없었고 어른으로서는 품위가 없었다.



글을 쓰려고 바로 전에 썼던 에피소드를 보니, 운 좋게 마침 같은 날에 일어났던 에피소드다. 업무 수첩을 뒤져야 하는 수고를 덜어 다행이다.



프런트 데스크에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출항 시간 전후로 30분 정도이다. 배가 항구에 정박해 있다가 바다를 향해 다시금 항해를 시작하는 순간, 즉 Sail Away를 감상할 수 있는 바로 그 시간이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오픈덱이나 객실의 발코니에 있곤 한다.



알고보면 흔한 광경, 그래도 항상 설레이는 Sail Away



이런 아름다운 Sail Away가 무사히 존재하게 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크루들이 있다. 바로 수 천명의 승객과 크루들에 대한 입출항 허가, 즉 Ship Clearance를 담당하는 크루들이다. 선사마다 포지션명이 다르긴 하지만, 이는 보통 Administration Manager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대부분 비슷한 절차이긴 하지만 각 항구 즉 국가마다 다른 요구사항이 있기도 하고, 간혹 알 수 없는 이유로 추가 절차가 진행되기도 한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항구 측에서 특정 승객의 여권을 잠시 회수해갔다가 검사를 한 후에 배로 다시 돌려주는, 그런 상황이다.






내가 여권 아줌마를 만난 상황은 바로 Ship Clearance와 Sail Away, 그 경계선이었다.


로비는 조용했고 프런트 데스크에는 나 혼자 남아있었다. 드디어 찾아온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며, 놓친 것이 없나 조금 전에 처리했던 업무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나의 시선은 로비와 중앙계단을 확인할 수 있는 정면이 아닌, 업무 수첩과 컴퓨터를 확인할 수 있는 밑을 향해 있었다.



사진에서는 안보이지만 왼쪽 계단 밑이 내가 있는 프런트 데스크, 그 앞에 중앙 로비와 계단, 오른쪽 천장 밑에 보이는 창과 문이 있는 곳이 게임룸.



얼마 가지 않아 로비 어딘가에서 거친 말투의 일본인 여성이 영어로 소리 질렀다.


"나를 도대체 왜 부르는 거야!? 왔으니까 이제 간다! 여권 때문에 여기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무방비 상태에서 들려온 외침에 당황했지만, 그 와중에 "파스포-토"라는 단어가 귀에 박혔다. 중요한 상황일지도 모른다고 감지했고 섣불리 승객을 그냥 보내면 안 된다고 판단하여, 멀리 떨어져 있던 그녀에게 손짓하면서 데스크로 오기를 권했다.


승객은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외모도 말투도 꽤나 고집이 있어 보이는 60대 초중반의 일본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계속 소리를 질렀고 계단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계속 영어만 쓰던 그녀는 내가 일본어로 당장 오셔야 한다고 큰소리를 친 후에야 겨우 다가왔다.


"당신 뭔데 나한테 오라 가라 그러는 거야!? 일본인이 일본 땅에 있는데 도대체 무슨 여권이 어쩌고 저쩌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방송으로 나를 불러대는 거야!? 너네들 때문에 카드게임 다 망쳤잖아! 나 지금 너한테 왔지? 그러니까 이제 간다!"


씩씩거리면서 다가온 그녀는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고, 카드게임을 하던 중이었으니 방해하지 말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불쾌감을 표현했다.


상황은 이랬다. 당시 세관에서 배로 돌아오는 승객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검사를 했고, 그중 한 명을 항구에서 놓쳤기 때문에, 승객이 세관을 만나러 항구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물론 선사 측이 아닌 일본 측의 요구였고, 승객을 찾을 수 없었던 Admin은 선내 방송을 한 것이다. 조금 전까지 줄지어 오는 승객으로 분주했던 나는 방송을 듣지 못했고, Admin은 나와 공유할 타이밍을 놓친 상황에서 그녀가 들이닥친 것이었다.


나는 Admin에게 항구에서 직원이 직접 올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고, 그동안 나는 이 승객을 어떻게든 붙잡아 두기로 했다. 그녀는 초지일관 카드게임을 운운하며 나를 향해 혀를 차면서 굉장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붙잡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항구에서 직원이 왔고, 여권을 보면서 승객과 몇 마디 나누더니 1분도 되지 않아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는 마치 중대한 일이라도 있는 듯 게임룸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뛰어갔다.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었다고, 이제 무사히 Sail Away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승객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돌아왔다. 다른 승객들을 무시하고 내 앞으로 다가와 소리를 질렀다.


"너 말이야. 굉장히 기분 나빠. 어디서 감히 나한테 건방지게 와라 기다려라야. 네가 퀸 엘리자베스 직원이면 다야? 퀸 엘리자베스 직원이라고 프라이드가 높은 건 알겠는데. 내가 30년도 넘게 크루즈를 타면서 기사를 썼어.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너 내가 가만히 안 둬."


참고로 일본 내에서는 전 세계 크루즈 중에서도 큐나드, 그중에서도 퀸 엘리자베스에 대한 동경이 굉장하다. 1975년 세계일주 중인 퀸 엘리자베스 2호가 처음으로 일본에 입항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코베에는 20만 명, 요코하마에는 50만 명이나 왔을 정도이다. 이후 일본인에게 퀸 엘리자베스는 감히 아무나 탈 수 없는 꿈의 호화 여객선이 되었다.



1975년 코베 항구, 퀸 엘리자베스 2호의 일본 첫 입항 (출처: 후나무시 사진가)


1975년 요코하마 항구, 퀸 엘리자베스의 입항을 구경하러 온 인파 (출처: 아사히 신문)



나는 일본 내 크루즈 업계에서 영향력 있는 두 분을 안다. 내가 전에 근무했던 스타크루즈에서 두 분을 서포트하면서 만나게 되었고, 그중 한 분은 개인적으로도 계속 만날 정도의 친분을 쌓고 있다. 두 분에게서 느껴지는 공통점이 있다. 스타일은 다르나 기본적으로 말투, 행동, 차림새 등 모든 것이 꽤나 수준급으로 정돈되어 있다. 수십 년간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자기 자신을 잘 가꾸고 표현하는 멋있는 여성들이다. 반면 이 승객은 말투는 예의 없었고, 행동은 품위 없었고, 차림새는 형편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으스대며 큰소리 치면, 내가 겁을 먹고 머리 숙여 사죄할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무섭기는커녕, 기분 나쁠 가치도 없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우스꽝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몰라 뵀습니다. 제가 이름을 말씀 안 드렸네요. 저는 큐나드 퀸 엘리자베스에서 근무하는 리셉셔니스트 임수민입니다. 저에 대해 코멘트가 하시고 싶으시면 선내든 본사든 자유롭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내 이름을 메모지에 적어 주었다.






나는 승무원, 그리고 그 어떤 서비스직의 종사자든지, 모든 상황에서 모든 손님에게 조건 없이 웃어주고 친절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황에 맞추어 시의적절한 안내 및 전달, 제지를 하는 것이 더 올바른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크루즈 승무원은 그 분야와 포지션이 다양해서 각각의 역할이 다르다. 그중 프런트 데스크만 말하자면, 무조건 경청해야 할 때도 있고, 상냥하게 대응해야 할 때도 있고, 단호하게 거절해야 할 때도 있고, 엄격하게 안전이나 보안을 우선해야 할 때도 있고, 침착하게 긴급 상황에 대처해야 할 때도 있다.


여권 아줌마는 처한 상황에 대해 납득하지 않았고 응대하는 나에 대해 불신했다. 그런 그녀에게는 친절한 미소와 상냥한 높은 톤의 말투보다는, 단호한 표정과 낮은 톤의 말투로 보다 설들력있게 내용을 전달하고 신중한 태도로 제지해야 했다. 3천여 명의 원활하고 즐거운 Sail Away를 위해서였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여행지에 가면 또는 비행기나 배를 타면 내 상황과 기분과는 상관없이 혼자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안 되는 경우가 반드시 있다.


여행지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매너와 의무도 챙기면서 품위 있는 한국인 여행자로서의 모습을 유지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된 경험이었다.



알고보면 흔한 광경, 그래도 항상 가고싶은 Sail Away






매거진의 이전글 땅콩 항공 아니고, 물병 크루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