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승무원의 일상 <기항지 편 ep. 4>
부리토, 엔칠라다, 과카몰리, 타코스, 그리고 같이 마시는 도스 에퀴스, 돈 훌리오.... 멕시코를 좋아하기에 충분한 이유다.
20대 초반에 처음 먹어 본 미국 달라스의 텍스멕스 음식, 그리고 치폴레의 부리토. 내가 한국이나 일본에서 잘한다는 멕시칸 레스토랑에서 맛본 음식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도는 맛이었다. 그때부터 멕시코는 내가 반드시 가보고 싶은 나라 중 하나로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Tex-Mex: 텍사스와 멕시코가 합쳐진 단어로, 멕시코와 국경을 맞댄 텍사스주에서 멕시코 이민자들이 시작해서 미국 전역으로 퍼진, 이를테면 아메리칸 스파이시 및 스타일이 가미된 멕시칸 요리.
Chipotle: 1993년 미국에서 시작한 부리토 체인점으로, 개인적으로는 제발제발제발~~~ 한국에 들어왔으면 하는 브랜드. 내가 원하는 재료로만 터지도록 꽉 채운 부리토.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게 맛있는데 게다가 비싸지도 않은 부리토. 먹고 싶다 부리토.
언제 가보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멕시코. 그래서 그 당시 항차의 포트 쵸이스는 카보 산 루카스 (Cabo San Lucas) 였다.
Port Choice: 최장 휴식 시간인 5~6시간을 배정받기 위해 미리 신청하는 항구로서, 일반적으로는 한 항차당 한 항구만 가능하다.
가보지도 않은 멕시코를 좋아하는 이유가 음식이니, 가보게 될 멕시코를 위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물론 레스토랑이었다. 카보 산 루카스는 멕시코의 5대 관광지로 해변가를 바라보며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멋스러운 레스토랑이 많다. 하지만 나는 현지인들이 운영해온 동네 사람들도 찾는 그런 동네 식당을 가기 위해 검색에 검색을 더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나의 멕시칸 현지 첫 식사, 그 역사적인 순간을 빛내 줄 식당은 바로 가르데니아스였다. 이 식당은 약 30년 전에 플라스틱 테이블 몇 개에 야자수 나뭇잎으로 지붕을 만들어 시작했고, 가족들이 대대로 운영하고있는 동네 맛집이다. 현지에서 먹는 음식이 무엇인들 안 맛있겠냐마는, 전혀 상업화되지 않은 뭔가 원주민 멕시칸 메뉴의 냄새가 풀풀 풍겨지는 느낌에 딱 꽂히게 되었다.
몰카제테, 퀘사디야, 토르티야 수프.... 뭘 먹을까 따위는 고민하지 않았다. 뭘 먹든 너무 맛있게 너무 행복하게 먹을 거였으니까.
현지 음식으로 배를 한가득 채운 다음은, 카보 산 루카스의 매력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액티비티를 계획했다. 바다 수영, 스노클링, 스쿠버 다이빙, 제트 스키, 카야킹, 패들 보딩, 파라세일링, 보트/요트 투어, 스포츠 낚시, ATV 드라이브, 낙타 타기, 트래킹, 짚라인 등, 일주일을 있어도 다 할 수 없는 즐길 거리가 너무 많았다. 나는 한정된 시간 안에 제대로 놀아 보기 위해 검색에 검색을 더했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나의 선택은 바로 클리어 보트 투어였다. 보트 투어는 소형에서 대형, 캐주얼에서 럭셔리까지, 여러 종류의 보트와 투어 스타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이 투어는 일단 보트 전체가 투명하게 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멕시코 바다에서 하는 액티비티가 무엇인들 안 재밌겠냐마는, 보트 위에서 360도 시야로 바다를 만끽할 수 있겠다는 느낌에 딱 꽂히게 되었다.
바다 수영도 하면서 모래사장 낮잠도 자면서 해 떨어질 때까지 놀고 싶은 러버스 비치와 디보스 비치 (Lover's Beach & Divorce Beach). 흥미롭게 생긴 것이 붙여진 이름까지도 흥미로운 펠리컨 록 (Pelican Rock) 과 넵튠스 핑거 (Neptune's Finger) 를 비롯한 암석들. 대략 4년마다 조수가 바뀌는데, 엄청나게 운이 좋다면 아치 밑을 걸을 수도 있다는 아치형 암석이자 카보 산 루카스의 상징이기도 한 엘 아르코 (El Arco). 기다란 바하 반도의 땅끝으로 코르테스 해가 태평양을 만나는 지점이기도 한 랜드즈 엔드 (Land's End). 이걸 다 가까이에서 구경할 생각에 들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오션뷰와 마운틴뷰로도 모자라 피시뷰까지 더해진 투명 보트를 타고 말이다.
먹을거리와 즐길 거리가 끝난 다음은,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쇼핑이었다. 마리나 주변을 걸으며 알록달록한 디스플레이가 눈에 들어오는 상점에 들어가 기념품도 사고, 현지 슈퍼에서 나초와 맥주를 사서, 두 손 한 가득 들고 배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중에 그 어느 하나도 실행하지 못했다. 벼르고 벼른 포트 쵸이스인 카보 산 루카스에서의 꽉 찬 6시간 계획은, 그저 계획으로만 끝나버리고 말았다.
크루즈가 항구에 정박할 때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육지에 직접 접안하는 경우와 해상에서 닻을 내려 텐더 보트 (작은 구명 보트) 로 육지까지 이동해야 하는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 날씨와 파도가 안정적이지 않으면 텐더 보트를 운행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운행은 하지만 승객의 이동을 최우선시하기 위해 크루들의 외출을 금지하기도 한다.
배가 카보 산 루카스에 근접할 무렵, 사무실에서는 나를 불안케 하는 말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살이 불안정하니 정박해도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배가 닻을 내리고도 텐더 보트는 한동안 운행을 할 수 없었고, 한두 시간이나 지나서야 겨우 시작했다. 시작은 했지만 물살이 불규칙하니 텐더링도 불규칙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이런 경우 크루는 일절 외출을 할 수 없게 된다.
오전 근무가 끝나가도록 물살은 안정되지 않았다. 불안했지만 일단은 외출 준비를 한 상태로 아쉬운 대로 오픈 덱에 올라가서 햇볕을 쬐며 기다려 보기로 했다.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카보 아르코를 바라보며 자꾸만 줄어드는 나의 쉬는 시간에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방송이 울렸다. 크루들은 일절 외출 금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던 첫 멕시코 경험은 물 건너갔고, 그 깊고 깊은 안타까움을 친구 마리나와 함께 짐에서 땀과 셀카로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