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승무원의 일상 <기항지 편 ep. 9>
퀸 엘리자베스가 북유럽 크루즈를 시작하기 전에 경유하는 마지막 국가는 캐나다. 그중에서 이번 항차의 기항지는 핼리팩스 (Halifax) 와 세인트 존스 (St. John’s) 였다.
어떤 기항지든 업무상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관광 정보가 있다. 그런 기본 정보와 더불어 나는 항상 개인적인 호기심 또는 외출 계획을 위해 사전 조사를 많이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날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 외에는 조사를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핼리팩스는 지나가다 들리는 정도의 기항지로, 항구 근처에서 잠시 땅 위를 걸어 다니며 공기를 쐬는 딱 그 정도의 기항지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 똑같다. 이런 기항지는 승객들도 엑스트라 정보나 승무원들끼리만 공유하는 정보가 있나 알아보려고 데스크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핼리팩스에서, 나에게는 기항지 관광보다도 더 매력적인 만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우리 회사 큐나드의 창시자 사무엘 큐나드 (Samuel Cunard) 와 퀸 엘리자베스의 자매선 퀸 메리 (Queen Mary 2) 와의 만남이다.
기다리던 나의 외출 시간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에서 나와 메리 여왕에게 가니, 그 앞에는 큐나드의 아버지가 서있었다. 바로 1840년 대서양 횡단을 시작으로 큐나드 선사를 창립한 사무엘 큐나드, 그의 동상이다.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선사로 그 역사가 깊은 회사다. 모든 직원들이 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듯 나 또한 그러했다. 아버지와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아버지랑 찍었으니, 이제는 메리 여왕과 찍는 기념사진이다. 빨간 의자가 있어 별 뜻 없이 앉아봤던 건데 아주 기가 막히게 완벽한 포토 포지션이었다. 이 사진을 보니 내 친구 마리나가 더 보고 싶어 진다..
기념사진도 찍었으니 이제 또 다른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 뱃생활을 할 때면, 괜스레 육지 음식이 더 먹고 싶고 더 맛있게 느껴진다. 배가 안 고파도 먹어야 하는 왠지 먹어놔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까지 든다. 육지에서 맛본 이날의 치즈 듬뿍 햄버거는 바삭한 감자튀김은 시원한 생맥주는 술술 넘어가는 게 역시 꿀맛이었다.
다시 그 매력적인 만남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모든 선사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바다에서든 육지에서든 서로 다른 선사 소속의 배를 만날 때보다 같은 선사 소속끼리 만날 때가 더 반갑기 마련이다. 남이 아닌 우리 식구를 만나는, 그것도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이런 반가운 만남은, 같은 소속끼리는 동시간대에 동노선을 운행하는 데에 이점이 없으니 자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다.
몇 년 전에는 이러한 소중한 만남을, 그것도 세 여왕이 함께하는 이벤트를 계획한 적이 있었다. 바로 큐나드 선사의 17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이번 핼리팩스에서는 물론 그때와 같은 큰 규모의 이벤트는 아니지만, 두 여왕의 만남을 조촐하게 기념하는 우리들만의 잔치 같은 것이었다. 더 쉽게 말하면, 두 배가 함께 출항하는 그 잠시 잠깐의 순간을 20분 정도 호들갑을 떨며 시끌벅적하게 즐기는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선방이었다. 승객도 승무원도 모두 오픈덱에 나와서 뒤에서 다가오는 메리를 기다렸다.
드디어 가까이 다가 온 퀸 메리.
소리 질러 부르면 건너편 오픈덱에서 대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기도 했었다. 배가 얼마나 큰지 카메라에 전체 모습이 담기지 않을 정도였다.
뱃고동을 울리며 서로에게 인사하는 두 여왕.
오픈덱에 가득 차 있던 승객들과 승무원들은 손을 흔들며 소리쳐 인사했다. 배도 사람도 서로를 반가워하며 그 순간을 기념했다.
가까이 다가왔다 했더니 금방 떠나가는 퀸 메리.
이제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 가까이로 다가왔던 퀸 메리는 어느새 엘리자베스를 스쳐지나 멀어져 갔다.
그렇게 요란스러웠던 세일어웨이 이벤트도 끝이 났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세인트 존스로, 메리는 세계일주를 이어갔다.
이날은 큐나드 승무원이기에 의미 있었던 기항지 외출이자 이벤트였다. 여왕들도 내 뱃친구들도 바다도 보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