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에 찾아오는 말

by 수미소

이번 주말은 출발이 늦었다. 아침에 일어나도 서두를 마음이 나지 않았다. 창밖의 빛이 이미 한 차례 바뀐 뒤에야 시계를 봤다. ‘조금 늦어도 괜찮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스스로를 다그쳤을 텐데, 요즘은 그런 마음이 줄어들었다. 어머니도, 나도, 속도를 조금 늦추는 법을 배우는 중인 것 같았다.

도로 위의 햇빛은 오후의 각도로 기울어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으면 시간이 손에 잡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아침과 오후의 차이는 크다. 같은 길인데도 풍경이 다르고, 마음의 결도 다르다. 늦게 출발한 만큼, 오늘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시골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마당이 아니라 집 안에 계셨다. 대문은 닫혀 있었고, 인기척도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머니는 방에서 일어나 나오신다.
“오늘은 좀 늦었네.”
그 말에 책망은 없었다. 확인에 가까운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방문이 미안하기보다는, 그래도 왔다는 사실이 먼저였다.

집 안 공기는 평소보다 따뜻했다. 난로가 세게 켜져 있었고, 이불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어머니는 오늘 하루를 거의 집 안에서 보낸 듯했다. 밖에 나가셨냐고 묻자, 고개를 젓는다. “괜히 넘어질까 봐.” 그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기까지, 어머니도 많은 시간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점심은 이미 지나 있었고, 우리는 늦은 간식처럼 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간단히 먹자고 하셨지만, 나는 국을 데웠다. 어머니는 말없이 그릇을 내민다. 이런 장면들이 이제는 설명이 필요 없다.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굳이 정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안다.

밥을 먹고 난 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은 켜지지 않았고, 라디오는 틀지 않았다. 어쩌다 이런 시간이 생기면, 나는 괜히 말을 꺼내지 않는다. 말은 보통 늦은 오후에 찾아온다. 마음이 조금 풀어지고, 하루가 기울 때쯤에야 나온다.

해가 낮아질 무렵, 어머니가 갑자기 말을 꺼내셨다.
“요즘엔 밤이 오면 괜히 불안해.”
그 말은 준비되지 않은 고백처럼 들렸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하기엔 너무 가볍고, 이유를 묻기엔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내 반응을 기다린 듯, 천천히 말을 이어가신다.

“아무 일도 없는데, 그냥… 하루가 끝나는 게 좀 그렇다.”
그 말 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혼자 남는 시간, 조용해지는 집, 어둠이 가져오는 생각들. 나는 그제야 왜 어머니가 주말마다 나를 기다리는지, 조금 더 분명히 알 것 같았다. 밥을 먹는 것도, 일을 도와주는 것도 아닌, ‘밤이 오기 전까지 함께 있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그날 조금 더 머물렀다. 특별한 이유를 만들지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고, 어머니도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해가 완전히 지고, 창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었다. 그 시간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다만 충분했다.

저녁이 되자 어머니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불안이 조금 가라앉은 듯 보였다. 나는 그제야 돌아갈 준비를 했다. 어머니는 오늘은 대문 앞까지 나오셨다. 손을 흔들지는 않으셨지만, 문을 닫지 않고 내가 차에 오르는 걸 지켜보셨다.

차를 몰고 나오며 생각했다. 오늘 나는 효자인 척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냥 ‘옆에 있는 사람’으로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가 바랐던 건 그 역할이었는지도 모른다. 잘하는 아들도, 바쁜 아들도 아닌, 해 질 녘까지 함께 있어주는 존재.

85세 어머니 앞에서, 오늘도 나는 효자인 척했다. 하지만 그 척이라는 말은 점점 힘을 잃고 있다. 꾸미지 않아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주말에는 또 어떤 말이, 어떤 침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그 답을 미리 정하지 않는다. 다만, 늦은 오후가 오기 전에 다시 그 길을 달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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