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잘하려는 순간, 오래가지 못한다

변화는 결심이 아니라 누적이다

by 수미소

우리는 늘 ‘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 마음이 순수해 보인다.


조금 더 나아지고 싶어서,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라고 믿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은 어느새 부담이 된다.


잘하려는 마음이 커질수록 몸은 무거워지고, 마음은 쉽게 지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멈춘다.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가 말하는 ‘잘한다’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기준으로 삼는 ‘잘함’은 대부분 내가 세운 기준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기준 속에서 살아왔다.


공부를 잘한다는 기준, 운동을 잘한다는 기준, 일을 잘한다는 기준. 그 기준들은 언제나 바깥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준에 가까워질수록 칭찬을 받았다.


“야, 저 놈 잘하네.”
“공부 잘하네.”
“일 잘하네.”


그 말들은 달콤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 중에 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그렇게 해야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묻지 않게 되었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건지, 나에게 맞는 속도인지, 이 방식이 나를 오래 데려갈 수 있는지.
잘하려고 한다는 것은 곧 기준을 의식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기준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지금 하고 있는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게 된다.


잘하고 있는지, 부족하지 않은지, 남들보다 뒤처지지는 않는지. 행동이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못하고, 항상 의식의 조명을 받는다.


그 순간부터 마음은 경직된다.
몸은 힘이 들어가고, 숨은 얕아진다.
잘하려는 마음은 우리를 앞으로 밀어주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래 버티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해보자.”
“이번에는 대충 안 하고 제대로 해보자.”
그 말 속에는 결심과 동시에 긴장이 들어 있다.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은 곧 실패하면 안 된다는 압박으로 바뀐다. 그러면 시작은 늦어지고, 시작을 해도 마음은 무겁다.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면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그렇게 잘하려는 마음은 어느새 채찍이 된다.


잘하려는 마음이 왜 이렇게 우리를 지치게 할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잘하려는 순간,


우리는 현재가 아니라 결과에 서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행동을 즐기거나 감당하는 대신, 그 끝에 있을 평가를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그 평가는 대개 가혹하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한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처음부터 힘을 준다.
이번에는 대충 하지 않겠다고, 제대로 해보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래서 기준을 높게 잡고, 속도를 빠르게 올린다.
처음 며칠은 괜찮다.
오히려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진다.


‘나도 하면 되는 사람이었네’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상태는 오래가지 않는다.
몸은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마음은 계속 결과를 계산한다.


조금만 흐트러져도
“이렇게 할 거면 왜 시작했지?”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루를 빼먹는다.


하루쯤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하지만 그 하루는 곧 다음 날을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역시 나는 안 되는구나.”


반대로 이런 경우도 있다.
처음부터 기준을 낮춘다.
어차피 잘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대충 하거나 미루는 쪽을 선택한다.


마음은 편하다.


하지만 그 편안함 속에서
아무것도 쌓이지 않는다.
그래서 며칠이 지나도
아무 변화가 없다.


그러면 또 이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우리는 늘 이 두 극단을 오간다.
처음엔 너무 힘을 주고,
지치면 아예 힘을 빼버린다.


그래서 오래가지 못한다.
문제는 의지가 아니다.
힘을 주는 방식이다.


우리는 지속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로
시작부터 끝까지 밀어붙이거나,
아니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래 가는 방식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힘을 빼지도, 과하게 주지도 않는 상태.
오늘의 나에게 무리가 없는 속도.
내일의 나도 다시 이어갈 수 있는 기준.


그 기준은
‘잘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내일도 할 수 있는지’로 정해진다.


우리가 이 중간을 거의 배워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두 극단 사이를 오간다.
처음에는 너무 빡세게 하다가,
지치면 완전히 놓아버린다.


왜냐하면 기준이 언제나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기엔 잘해야 하고, 스스로 보기에도 뒤처지면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잘함’은 점점 욕심의 다른 이름이 된다.


부처님은 집착이 괴로움의 근원이라고 했다.
잘하려는 마음 안에는 언제나 집착이 숨어 있다. 결과에 대한 집착, 평가에 대한 집착,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대한 집착. 그 집착이 현재를 망친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불교에는 이런 말이 있다.
방하착(放下着).
내려놓아라.
잘해야 한다는 강박, 제대로 해야 한다는 집착을 내려놓아라.
또 이런 말도 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결과나 형식에 붙들리지 말고, 지금 해야 할 일을 가볍게 하라는 뜻이다.


이 말들은 무언가를 대충 하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동에 과도한 의미를 덧씌우지 말라는 말이다. 오늘의 한 행동이 내 인생 전체를 증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늘 그렇게 행동한다. 오늘의 성과로 나를 평가하고, 오늘의 실패로 나를 단정 짓는다.


그래서 잘하려는 마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잘하려고 할수록 시작은 더 어려워지고, 지속은 더 힘들어진다. 마음은 늘 긴장 상태에 놓이고, 그 긴장은 에너지를 빠르게 소모시킨다.


오래 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다르다.
그들은 처음부터 잘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그냥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부족해 보여도, 오늘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그래서 오래 간다.
‘잘하기’보다 ‘그냥 하기’를 선택하는 순간, 마음의 힘은 빠진다. 힘이 빠지면 움직임은 부드러워진다. 부드러운 움직임은 오래 지속된다. 그리고 그 지속이 쌓이면, 어느 순간 우리는 남들이 말하는 ‘잘함’에 도달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잘하려고 애쓰지 않은 사람이 결국 잘하게 된다.
반대로 잘하려고 힘을 주던 사람은 중간에 지쳐 멈춘다.


그래서 이 연재가 계속 말하는 것은 같다.
변화는 결심이 아니라 누적이다.
그리고 누적은 힘을 빼야 가능하다.
혹시 지금, 너무 잘하고 싶어서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기준이 너무 높아 숨이 막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잠시 멈춰도 괜찮다.


거문고 줄을 한번 살펴보자.
너무 팽팽하지 않은지.
이미 끊어질 만큼 조여놓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은 잘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은 그냥 해도 된다.
그 ‘그냥’이 쌓일 때,
삶은 오히려 오래, 멀리 간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3화3화. 사람은 의지가 아니라 환경에 반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