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오늘도 그대로인 것 같을 때

변화는 결심이 아니라 누적이다

by 수미소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도 괜찮은 걸까.


남들은 이미 한 발 앞에 가 있는 것 같고,

나만 제자리에서 서성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뒤처진 건 아닐까,

이미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상태로 산다.


해야 할 공부,

해야 할 일,

해야 할 선택.


그 목록은 줄어들지 않고,

시간은 계속 앞으로 간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더 조급해진다.


움직이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고,

지금 이 속도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이 밀려온다.

“나만 이렇게 처진 건가?”

“다들 각자의 길에서 뭔가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나도 한 발 더 나가야 하는데.”


이 조급함은

의지가 약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비교 속에서 살아가는 구조에서

너무 당연하게 생기는 마음이다.

특히 학창 시절에 대한 기억이

이럴 때마다 불쑥 올라온다.


그때 조금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

그때 조금만 더 참고 버텼더라면.

그때 한 번 더 도전했더라면.

우리는 과거의 어느 시점을 붙잡고

현재의 나를 평가한다.


그리고 그 평가에는 늘 아쉬움이 따라붙는다.


“그때 왜 그랬을까.”

“왜 나는 남들만큼 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이 질문에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빠져 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 시절의 나는

그 시절의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비록 그 최선이

지금 기준에서는 부족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흔히 말한다.


“아무것도 안 한 시간 같았다”고.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그 시간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아무 고민도 없었을까.

아무 갈등도 없었을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었을 뿐,

마음속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고,

이 길이 맞는지 끊임없이 물었고,

포기할지 말지 수없이 흔들렸다.


그 모든 고민은

어디로도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아무것도 안 한 시간’이라고 부를 뿐이다.


하지만 삶은

눈에 보이는 결과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은 고민한 만큼,

망설인 만큼,

부딪힌 만큼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그 시절에 했던 수많은 생각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다만 그 과정은

성적표에도 남지 않았고,

이력서에도 적히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쉽게 평가절하한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었다는 이유로

그 시간을 통째로 지워버린다.


하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그 시간 덕분에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선택들이 있다.


예전 같았으면

함부로 결정했을 일들을

지금은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무작정 달려들던 일 앞에서

잠시 멈출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다.


조급함이 올라올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 마음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 마음이

자책으로 이어질 때다.

“왜 나는 아직 이 정도지.”

“왜 나는 이렇게 더딜까.”


이 질문은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보다는

지금의 나를 깎아내린다.

그리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방식으로는

오래 움직일 수 없다.


변화는 늘

지금의 나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는 시작되지 않는다.

지금의 나를 인정하는 순간에

비로소 가능해진다.

아무것도 안 한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삶은 멈추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무언가가 쌓인다.


그게 바로 이 연재가 말하는

‘누적’이다.

누적은

늘 눈에 보이는 형태로만 쌓이지 않는다.


생각이 쌓이고,

기준이 쌓이고,

이전의 나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쌓인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예전과는 다른 반응을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예전 같았으면 조급해했을 상황에서

조금은 버틸 수 있게 되고,

예전 같았으면 바로 포기했을 일 앞에서

한 번 더 고민하게 된다.


그 변화는 너무 작아서

스스로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말한다.

“아직도 그대로인 것 같아.”

하지만 정말 그대로일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들이

쌓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그 하루하루는 결코 공백이 아니다.


우리는 늘

“이제 뭐를 해야 할까”를 묻는다.

하지만 가끔은

“이미 무엇을 지나왔을까”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질문은

조급함을 조금 낮춰준다.

그리고 숨을 고를 공간을 만들어준다.

지금의 속도가

남들보다 느려 보일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속도보다 중요한 건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날에도

삶은 조용히 쌓이고 있다.


당신이 눈치채지 못한 방식으로,

하지만 분명하게.

오늘도 그대로인 것 같다면,

그건 실패의 증거가 아니다.

아직 결과로 드러나지 않은

누적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리고 그 누적은

언젠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단단한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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