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부터 집에 일이 생겼다. 그로 인해 내적으로, 외적으로 변화도 생겼다.
나는 생각보다 가족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가족의 결합, 가족의 정의, 가족의 정신건강. 그것들을 생각하며 나를 희생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가는 형편없었다. 가족이 아닌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하고 속 보이는 변명들로 나를 대할 때는 실망이 환멸로 다가올 즘이었다. 나의 마음을 위로하는 건 수면등에 의지해 써 내려가는 글뿐이었다. 속 사정을 알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을 보며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면 되레 상처로 다가왔다. 꾹꾹 눌렀다가 언니에게 조금 털어놓으면 결론은 내가 참으라는 것인데 그게 얼마나 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것만 끝나면 명절 때만 가족을 볼 계획이었다. 지금은 다 틀어졌지만.
나를 위한 선택은 어떤 것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좀 더 투쟁해야 했나 싶다가도 내가 한 선택들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욱 절망스럽다.
우리 집 막내 고양이가 복덩어리다. 부모님이 내뿜는 서로 간의 적대감을 온몸으로 받아 등이 굽어있으면 고양이가 다가와 다리에 이마를 비비적거린다. 물론 그 행위가 묵직함을 떨쳐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일이 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사라지길 바랐을 때도 고양이는 내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래서 온 가족이 파양하자고 주장할 때 모든 걸 포기하고 지켜낸 말괄량이 고양이다.
5년 동안 만난 남자친구도 행운이. 마냥 평온하지만은 않았던 5년이지만 가족보다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다. 미성숙한 시기를 함께 보내고 드디어 믿음이 생긴 지금은 누구보다도 나를 위한 사람이다. 남자친구 자취방에서 혼자 밥을 먹다 깨달았다. 어쩌면 내가 가족에게 바랐던 것들을 해주고 있다고. 그래서 나는 너와 미래를 그리고 있다고. 그걸 들은 너는 이제 알았냐며 당연하다는 듯 행동하지만, 그 속에는 무한한 노력이 숨어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놓지 못하겠다.
글을 잘 썼다는 평가를 받을 때는 항상 슬플 때였다. 지금도 그런가?
슬픈 시기는 지났고 콕 집어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을 부어 졸여진 마음이 달랑거린다. 소스가 잘 스며들어 조금만 닿아도 주르륵 흘러버리니 부딪히지 않게 보존해야 한다. 그게 지금 나의 상태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해줄 말은 없다. 깊은 가정사니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것도 있고 굳이 알아서 뭐 하나, 좀 더 파보면 나를 제대로 이해해 줄까? 반대로 내가 원하는 위로를 네가 해줄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그러지 못할 바엔 그냥 그런 애로 남는 편이 좋다. 그게 서로 속 편하니까.
몇 주째 두통이 사라지질 않는다. 상반된 생각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흔적이다.
나를 힘들게 만든 사람과 상황이 끊임없이 반복되다 내가 자기연민에 빠진 건 아닌지, 또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남고 싶어 기억을 미화시키는 건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객관적으로 봐줄 사람이 필요함에도 손을 내밀지도 잡지도 않는다. 그 결과로 모난 돌이 신나게 두개골 속에서 굴러다닌다.
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돌이 있으니 정상적인 생활은 없어졌다. 수면 패턴도 꼬이고 무언가를 할 의욕도 사라졌다. 백수 주제에 흥청망청 하루를 보낸 벌로 받아들여야 하나. 열심히 살지 않은 대가로 고장 난 매일을 살게 하는 것일까. 이것도 전부 자기연민일까.
여기에서도 전부 털어놓지 못하는 사실이 원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