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섬콩 Jun 07. 2020

결혼기념일에 끄적이는 조금 사적인 이야기


"당신은 왜 나에 대해서는 쓰지 않아?"

오랜만에 브런치에서 나의 글을 읽은 남편이 뜬금없이 물었다.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나는 우물쭈물 대답을 찾지 못했다. 서운해서 묻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궁금해서 그러는지 되묻지는 않았지만, 남편 역시 그저 지나가는 가벼운 질문이었던지 내게  이상 대답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상의  틈이 생길 때면 나는  속으로  이유를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사사로운 나의 생각과 아이들이 크는 과정, 한국에 있는 그리운 엄마와 언니,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얘기들을 종종 쓰면서도 남편에 대해서는 굳이 포커스를 맞추어 쓰지 않는 이유. 쓰더라도 세세한 것들은 빼고 적당히 뭉뚱그리는 까닭을 굳이 설명하자면 그에 대한 나름의 배려라고 해야 할까.

사적인 SNS조차도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공개하는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는, 어딘가에 무엇이든 쏟아내고 싶은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 때문이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에너지를 분출한다. 나의 딸아이는 하루 종일 밖에서 자전거를 타고 축구를 하고 달리기를 해야 행복하고, 아들 녀석은 그림을 그리거나 게임을 하고, 때로는 가만히 이불속에 누워 있어야 뭔가 해소가 되는 것처럼, 나에게는 무언가쓰는 일이 그것이었다.

낯선 더블린에    자신과 주변을 찬찬히 돌아볼 여유가 생기기까지 거의 1 정도의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그사이 이곳의 사람들과 조금 가까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영어로 대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더블린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들도 여럿 알게 되었지만 언어가 통한다고 마음까지 활짝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운동도 싫어하고 게으르기 그지없는 이에게 외로움은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이라 많은 것을 혼자 즐기고  삼켜야 했지만, 아주 최소한의 에너지라도 분출할 출구가 내게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글이라는 것이 쓰다 보면 어떻게든 내 일상이 묻어나고 주관적인 생각이 반영되다 보니, 닉네임을 사용하고 얼굴을 노출하지 않아도 쓰는 이의 이미지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먼 나라에서 지내고 있는 우리 가족의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수다를 떨듯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고, 이 먼 아일랜드까지 찾아와 주는 지인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이곳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이야기는 더 장황해졌다.

처음 지내보는 곳에서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며 좌충우돌하는 아이들이 어떤 때는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대견스러웠다. 이곳에서 지내는 소중한 시간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지, 나중에 알려줘야지 마음을 먹으면서도 점점  미더워지는 나의 기억력과 순간에 멈춰있는 사진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이다음에 아이들에게 이곳에서의 추억을  자세하게 남겨주고 싶다는 핑계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끄적이기 시작했지만 점점 자아가 커져가는 아이들의 생활을 동력 삼아 무언가를 쓰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노출하는 것이 가끔은 미안했다.

생각 없이 쓴 글이 이따금씩 '다음' 메인창에 소개되고 페이스북에 공유되고 카카오톡 뉴스 페이지에 실릴 때면 신기하면서도 덜컥 겁이 났다. 숨어있는 나를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마음과, 그래도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고 공감해주었으면 하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미묘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한번은 더블린에서 친하게 지내는 지인이 "혹시 무슨 블로그에 글 써?" 하고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왜?"하고 물으니 “내 친구가 무슨 글을 읽었는데, 내 얘기가 나온 것 같았대.” 하는 것이었다. 더블린이 워낙 좁고 한국인이 많지 않다 보니 개인적인 정보를 노출하지 않았는데도 정황만으로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차리기도 했다.

몇 달 전 한국에서 이곳으로 여행 왔었던 한 지인은 더블린에 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찾다가 우연히 어떤 글을 읽고 단번에 나라는 것을 알아봤다고 했다. 이렇다 보니 아이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라도 이름은 태명을 쓰고 지인들은 이니셜을, 그리고 사진은 주로 뒷모습만 사용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남편은 내가 브런치를 시작했을  제일 먼저 등록한 구독자였다. 나는 주로 집안 어딘가에 숨어서, 그리고 시간을 쪼개서 몰래몰래 글을 쓰는 편인데, 그렇게 조각조각을 모아 완성된 글을 새벽 즈음 발행하고 나면 바로 옆에 있는 남편의 핸드폰에 띵동 하고 알림이 울려서  쑥스러울 때가 많았다. 물론 그는 누구보다 나의 이야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지만 거의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일상을 공유하는 가장 사적인 관계인 남편이  글을 읽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는 일이 가끔은 곤혹스러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글을 발행한 후에도 그의 핸드폰의 알림이 울리지 않기 시작했다. 어떤 시스템의 문제인지는   없었다. 한국에 있는 언니와 다른 지인 몇몇도 언제부턴가 알림이 울리지 않는다면서 요즘 글을 쓰지 않냐고 가끔 묻긴 했지만, 나는 오히려 다행이다, 여겼다. 이상하게도 나를  아는 사람들이  얘기를 읽는 것이 종종 부끄럽기도 했다. 어쨌거나 알람이 사라진 후로 나는 조금 편안히(?) 남편 몰래 글을 올렸고  사실을 모르는 남편은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번씩 궁금해지면 나의 밀린 글들을 몰아서 읽는 듯했다.


"거참 신기하네!"

어느 날인가 아침에 남편이  얼굴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여느 때처럼 포털 사이트를 둘러보다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제목의 글이 있어서 클릭을 했는데 읽다 보니 내가  글이었단다. 낯선 사람이  글인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매일 보는 아내의 이야기였다는 사실이 꽤나 신선했던 모양이다. 직업상 남편 역시 무언가를 계속 쓰고 말하는 사람인지라  역시도 그가 완성한 것들을 가장 먼저 읽고 을 때가 있는데, 최대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모르는 타인처럼 여기고 판단하려 해도 부부 사이에  완벽히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신의 글은 아주 사적이면서도 너무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어. 하지만  읽고 나면 따뜻하게 남아. 그래서 나는 당신의 글이 좋아."

나름 거리를 두려는 듯 애써 덤덤하면서도 결국은 내 편이라는 애정이 뚝뚝 묻어날 수밖에 없는 그의 얘기는, 쓸쓸하고 궁상맞게 무언가를 끄적이는 내게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되어주곤 했다.




더블린에 오기 전까지 한국에서 나와 남편은 자주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신혼 때 나는 왕복 세 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회사로 매일 출퇴근을 했고, 대학원을 다니며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남편은 살림을 도맡아 했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난 후 우리에게 첫 아이가 태어났고, 그때부터 남편은 정기적으로 출퇴근하는 일을, 나는 본격적인 육아와 살림에 돌입했다. 큰 아이 섬이가 막 말을 시작했을 즈음 밖에서 일하는 아빠와 영상통화를 하면서 "아빠 우리 집에 놀러 와요!"하고 말할 정도로 주말과 휴일의 구분이 없이 그는 항상 바빴다. 그리고 그런 일상은 둘째가 태어나고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느지막한 나이에 그가 더블린이라는 낯선 곳에 와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우리 가족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출퇴근 대신 책을 읽고 논문을 쓰느라 바쁜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학교와 도서관에 가는 것 말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집에 머물러 있었다. 외출을 하지 않는 날이면 거실 테이블에서 하루 종일 노트북을 두드리다가 때가 되면 그 자리에서 밥을 먹고 또 밤이 새도록 무언가를 쓰고 읽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나 삼식이야?(하루 세 끼를 모두 집에서 먹는 남편들을 놀리듯 이르는 말)."

어느 날은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알면서 뭘 묻냐는 듯 키득키득 웃으면서도 나는 신기했다. 이렇게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가 오래 머물 수 있는 것은, 더블린에서 지내는 지금 이때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블린에서 4년 동안 지내면서 감사하게도 나와 남편은 서로의 얼굴에 자리하는 세세한 주름과 늘어가는 흰머리를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얼굴만 마주치면 끝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듣다 보면 언젠가 여러 번 들었던 그 얘기가 또 흘러나와 도대체 몇 번째냐고 타박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의 얘기들이 마치 호흡처럼, 코 고는 소리처럼 익숙해서 빙그레 듣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 역시도 추억에 젖다 보면 언젠가 그에게 했을지도 모르는 얘기를 떠들 때가 많은데 들었던 적이 있는지 없는지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이 그저 평온하다. 몇 번의 도돌이표를 오고 가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 순간 우리는 그 얘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고, 들어주는 이가 서로여서 안심이 될 뿐이었다.


흐르는 시간은 우리에게도 노안이라는 것을 선물했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각자의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끄적이던 어느 날, 안경점에서 새로 맞춘 안경을 끼고 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 모니터를 응시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남편이 물었다.

"당신도 내 모습이 예전이랑 많이 달라진 걸 느껴?”

 모습이 달라졌다는 것을 굳이 돌려 말하려고 건넨 물음은 아니라는 것쯤은   있었다. 서로가 늙어가는 현실을 외면할 나이도 아니고, 래도 좋다, 쓸쓸하다 얘기한다고 서로 들뜨거나 마음 상할 만큼 얕은 사이도 아닌 우리는, 그저 흐르는 시간 사이에 잠시 쉼표를 꺼내 세워두고 찬찬히 서로를 들여다보아도 많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뽀송뽀송하고 팽팽했던 얼굴이 느슨하게 변해가는 것이 서글프기보다는, 같이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부부’의 특권이라는 것을 끄덕끄덕 수긍하게 되는 그런 때가 된 것이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긴 시간을 함께 산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도, 또 아는 만큼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일상에서 매번 비슷한 근육을 사용하다가도, 어떤 특별한 이유로 전혀 쓰지 않던 근육을 움직여야 할 때가 생기는 것처럼 살다 보면 전혀 접해보지 못한 상황에 직면할 때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지난한 육아의 과정이 특히 그랬고, 늦은 나이에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공부에 몰두해야 하는 남편 역시 매 순간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럴 때면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과 상대의 생소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와서 서로 당황스러운 순간에 놓이기도 한다. 마치 안 쓰던 근육을 쓴 다음 날 온몸이 생경한 통증으로 아픈 것처럼, 숨기고 싶은 모습을 드러낸 나 자신이 싫고, 상대가 낯설어서 한동안 아리고 쓰리기도 하지만 얼얼해진 근육을 서로 매만져주며 몰랐던 모습에도 서로 단련이 되어가는 것 또한 우리 부부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결혼기념일인 오늘 아침, 가만히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그의 물음 속에 담긴 답처럼 그도 나도  많이 변해있다. 늘어난 턱살과 뱃살은 당연하고, 서로 눈빛만 봐도 상황에 맞게 응대하고, 배려하는 기술도  노련해졌다. 상대의 기분에 따라 스스로 삼킬 말과 보탤 말을 구분할  아는 순발력과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눈치도 수준급이다. 어떤 때는 곁에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표정과 자세만으로도 마음의 소리를 들을  있는 초능력이 발휘될 때도 있다.


최근에 인상적으로 본 <반쪽의 이야기>라는 영화가 있는데, 몇 년 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오랜 시간 실의에 빠져있는 어떤 아빠가 등장한다. 자신의 딸을 짝사랑하는 한 소년에게 그는 떠나간 아내를 떠올리며 이렇게 묻는다.

"상대의 어떤 것도 바꾸고 싶지 않은 사람을  사랑해본 적이 있니?”

이제 막 풋사랑의 감정을 알기 시작한 소년이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꽤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16년이라는 꽤 긴 시간을 살아온 나에게도 그의 물음은 제법 묵직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가 나를 위해 바뀌어주기를 짐짓 강요한 적은 없었는지 생각이 저절로 깊어졌다. 분명 처음보다는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상대의 요구보다는 서로에 맞춰가기 위해 자연스레 변한 것들이 더 많은 것 같아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가 언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재밌어했고, 내가 하는 음식을 맛있어했는지, 나는 언제부터 그와 함께 듣는 빗소리를 즐기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처음이 무엇이고, 그것이 진짜였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아침이면,  그저  조각의 초콜릿보다 서로가 고른 음악이  맛있고, 그 순간이 영원하지 아서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면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오늘도 빙빙 돌리다가 놓쳐버린 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결혼 30주년 즈음으로 미뤄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신,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나마 객관적인 시선으로 우리 부부를 바라보고 있는 딸아이가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을 맞아 서툰 한국말로   동시  편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해야겠다.


부부의 사이

부부 사이가 되는 건 어떤 느낌일까?

서로 사랑해서 부부가 된 걸까?

누가 아프면 곁에 있어줘야 되고

추운데 있으면 같이 뭉쳐야 되고

부부가 되면 같이 살고 같이 자야 된다.

안 지겨울까?

안 불편할까?

우리 엄마 아빠는 2004년 6월 5일부터 오늘 2020년 6월 5일까지

16년 동안 안 싸우고 잘 사는 게 신기하다

솔직히 말하면 엄마 아빠도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낳고 키우느라...

앞으로도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할머니처럼 오래 가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