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나라 엄마들의 앵그리 지수
언젠가 딸아이가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돌아오던 날이었다. 우리 집까지 태워준 '프레야' 엄마의 차에서 내리면서 프레야와 둘이서 나를 힐끗 보더니 서로 묘한 웃음을 주고받는 것이 아닌가. 무언가 숨기고 있지만 들키고도 싶은 비밀을 만든 것이 분명했다. 친구를 배웅하고 집으로 들어온 아이에게 무슨 일이냐고 슬쩍 떠보았다. 밖에서 있었던 일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도 떠들고 싶어서 늘 입이 근질근질한 녀석은 그날따라 한참 뜸을 들이다가 킥킥 웃으며 털어놓았다.
“사실은 오늘 애들이랑 서로 엄마에 대해 얘기했거든. 누구 엄마가 제일 무서운지 점수를 매겼어.”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살짝 당황한 나는 애써 속내를 감추고는 무심한 말투로 다시 물어보았다.
“그래? 엄마는 몇 점이나 나왔으려나?"
"궁금해? 궁금해?"
마치 약 올리듯 자꾸만 밀당을 하는 아이에게 휘말리기는 싫었지만, 아이의 친구들까지 서로 점수를 매겼다니 살짝 떨리면서도 궁금한 마음을 쉽게 숨길 수는 없었다.
"신기하게도 엄마는 점수가 제일 낮았어. 애들이 엄마가 그래도 제일 친절하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속으로는 휴우~ 하며 가슴을 크게 쓸어내렸다. 참 고마운 친구들이다. 사실 내 아이들에게는 화도 내고 소리도 지르고, 가끔 꿀밤도 먹이는 앵그리맘이지만, 아이의 친구들에게는 화 낼 일이 거의 없었으니 앵그리 지수가 높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아이들의 영어는 더 알아듣기가 쉽지 않아서 친구들이 놀러 오면 되도록 말은 줄이고 늘 인심 좋은 얼굴로 웃어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가끔 우리 아이들이 친구들 앞에서 말을 안들을 때면 조용히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한국어로 나지막이 협박(?)을 하는 식으로 아이를 어르곤 했다.
"다른 엄마들은 몇 점이니?"
후한 점수를 받고 나니 슬슬 다른 엄마들 성적이 궁금해졌다. 어떤 엄마들이 대상에 올랐을지는 짐작이 갔다. 딸아이 콩이와 늘 붙어 다니는 삼총사 롤라, 프레야, 그리고 얼마 전 인도에서 전학을 온 후 부쩍 친해진 드비샤라는 아이의 엄마였을 것이다.
아이들의 점수 산출 방식은 간단했다. 자주 어울리는 네 명의 아이들이 자신의 엄마를 포함해서 네 명의 엄마들의 앵그리 지수를 매기고 그것을 모두 더한 점수가 가장 높은 엄마가 제일 무서운 엄마, 그리고 낮은 엄마는 친절한 엄마. 그리고 내친김에 아빠들에 대한 점수도 매겼단다.
내 점수가 가장 낮은 것이 '신기하다'라고 말한 콩이처럼 다른 아이들도 당연히 각자 자신의 엄마, 아빠에게 제일 높은 앵그리 지수를 주었을 테니 나머지 세 아이의 객관적인 점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작 넷이었지만, 어쨌든 체코에서 온 롤라 엄마가 제일 무서운 앵그리맘에 등극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무래도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라 조금 덕을 본 것 같아 다행이었다.
더블린에 온 후 친구를 만드는 일은 아이들이나 어른인 나나 쉽지 않았다. 우선은 언어가 문제였고, 서툰 영어 때문에 소심해진 성격은 한동안 우리를 굉장히 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열심히 학교에 잘 적응한 두 아이 덕분에 아이들의 친구 엄마들과 자연스레 소통할 일이 조금씩 생겼고, 가끔씩 플레이 데이트를 하거나 생일 파티에 오고 가다 보니 그들과 문자나 전화를 주고받으면서 점점 가까워질 수 있었다.
어쩌다 보니 신기하게도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엄마와 아이들 모두 국적이 달라서 처음에는 당연히 서로 잘 맞지 않을 거라는 선입견으로 상대를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내보니 나라와 언어는 쉽게 걷어낼 수 있는 아주 얇은 막에 불과했다. 네 엄마가 저마다 다른 생활문화와 생각, 교육방식, 취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저 우리가 모두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도 저마다 다양한 성격과 취향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냈던 것처럼 아일랜드에서도 그런 삶의 경험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콩이가 늘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라고 외치는 아일랜드 소녀 '프레야'는 콩이가 처음 학교에 가서 영어도 못하고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밀고 친절하게 대해준 친구였다. 프레야의 엄마 '에이브릴' 역시 나에게 제일 먼저 다가와 친구가 되어준 사람이다.
세 명의 아이 중 둘을 병원이 아닌 집에서 직접 출산했다고 말해서 나를 놀라게 한 그녀는 무엇보다도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사랑한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궂은 아일랜드 날씨 속에서도 그녀의 가족은 개를 끌고 거의 매일 산으로 하이킹을 다니고, 10월까지 바다 수영을 즐기는 것이 낙이다. 정원에는 아름다운 꽃과 열매들이 가득하고 계절 따라 산에서 꽃이나 블랙베리를 따서 파이나 음료수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취미 생활이기도 하다. 알고 보니 내 주변의 아일랜드 가족들 가운데 프레야네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일회용 플라스틱이나 종이 사용을 멀리하는 에이브릴은 특히나 아이들에게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는 것에 대해 자주 강조하고,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에 대한 시위가 인근 지역에서 열리는 날에는 아이들의 수업을 빼고 일부러 시위 현장에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가끔씩 프레야는 트램 안이나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당연한 듯 주워서 쓰레기 통에 버리곤 하는데, 에이브릴이 평소에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가 셋이다 보니 서로 싸우고 다투는 일이 비일비재한데도 그녀가 아이들에게 화를 내거나 억지로 무엇을 강요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한 번은 차 안에서 그 집의 막내 녀석이 누나와 형에게 막무가내로 떼를 쓰고 울어댔는데,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이를 몰아세우지 않고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돌아가면서 아이들의 의견을 묻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렇듯 순리대로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세 아이 모두 밝고 너그러운 면이 흘러넘쳤다. 다만 같은 엄마 입장에서 볼 때, 아이 셋에 강아지, 그리고 가끔 스페인에서 오는 홈스테이 아이까지 돌보느라 바쁜 그녀가 조금 안쓰러울 때가 많았다. 가족 모두의 요구를 되도록 다 받아주고 채워주다 보니 시간에 쫓기느라 약속을 잊거나 못 지키는 때가 많고 만날 때마다 늘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타지 생활에 힘든 내게 늘 긍정적인 에너지로 힘을 준 사람은 항상 에이브릴이었다.
롤라의 엄마 케이트는 우리 가족이 더블린에 정착하고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하는 동안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20대에 아일랜드로 건너와 대학을 다니고 결혼과 두 아이의 출산, 육아를 모두 더블린에서 해낸 그녀는 나보다 훨씬 먼저 타지 생활을 경험한 외국인 선배답게 우리 가족을 참 많이도 배려해주었다.
차가 없이 생활하는 우리 가족을 대부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볼 때, 케이트는 자신도 처음에는 그렇게 지냈다면서 딸아이 콩이와 롤라가 플레이 데이트를 할 때마다 항상 데려다주고 학교 생활에서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면 가장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날이면 혹시나 내가 잘 이해를 못했거나 오해할까 봐 고맙게도 문자로 다시 설명해주는 것도 그녀였다.
그런 똑 부러지는 성격답게 케이트는 아이들을 먹이고 키우는 데에도 자신만의 룰이 확실했다. 우선 그녀의 집에서는 설탕이 들어간 음식이나 건강에 해로운 음식을 찾아볼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치아가 약한 두 아이를 위해서 설탕 대신 다른 재료로 모든 음식에 단맛을 내는가 하면, 롤라네 집에서 먹는 간식은 주로 야채 스틱이나 곡물빵이어서 단것을 좋아하는 콩이는 롤라네 가면 먹을 것이 없어서 늘 배가 고프다고 불평을 해댔다.
비가 와도 산에 가고 10월에도 수영을 하러 다니는 프레야네 가족을 보면서 농담으로 '아이리쉬는 제정신이 아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케이트는 공원에 가도 세균 때문에 딸아이가 개울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만큼 위생관념이 철저했다. 때문에 프레야와 롤라가 야외에서 놀 때는 너무 다른 두 엄마의 성향 때문에 가끔씩 갈등이 생기곤 했지만 서로를 배려하며 풀어가는 요령도 잘 터득한 듯 보였다.
시간 개념도 정확하고 가족끼리의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케이트의 성격은 다소 느슨하고 게으른 내 입장에서는 닮고 싶은 면이 많았지만, 아이들이 볼 때는 그런 단호한 부모습이 제일 무섭고 엄격한 사람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늘 곁에서 나를 챙겨주던 케이트와 그 가족들이 COVID19 때문에 지난 6월에 모두 체코로 돌아가서 요즘은 그 빈자리가 더욱 크게만 느껴진다.
'드비샤'는 작년에 전학 온 인도소녀이다. 낯선 곳에 와서 적응하느라 힘들고 외로웠던 딸아이는 새로운 아이가 올 때마다 제일 먼저 관심을 갖고 그 아이에게 더욱 정을 많이 나눠주었다. 드비샤가 다행히 우리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서 둘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콩이는 먼저 아일랜드에 온 선배답게 드비샤를 챙겨주고 리드하리라 여겼지만, 전학생답지 않게 적응도 금세 하고 똘똘한 드비샤는 오히려 콩이를 언니처럼 이끌어줄 때가 많았다.
다정하고 세심한 드비샤의 성격이 엄마로부터 왔다는 것을, 그녀의 엄마인 ’가리마’를 만나고 나서 알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가리마는 학교에 온 첫날부터 드비샤가 학교 생활을 하는데 필요하고 알아할 사항을 상세하게 확인하고 궁금한 것이 생길 때마다 나에게도 적극적으로 먼저 연락을 하곤 하였다. 처음 더블린에 왔을 때 쭈뼛거리며 한동안 어리숙했던 나와는 달리, 드비샤가 배우고 싶은 춤이나 노래 학원도 금세 찾아내고 아이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라면 멀어도, 힘들어도 어떻게든 찾아서 연결해주는 열성적인 엄마였다.
인도에서는 활동적인 워킹맘이었지만 남편의 직장 때문에 아일랜드에 온 이후로는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를 위해 모든 정성과 헌신을 다하고 있는 그녀는 아이가 원한다면 인도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공부를 시키고 싶어 했다.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를 유난히 더 애지중지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결혼 초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이를 오랫동안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부부에게 드비샤는 뒤늦게서야 얻게 된 소중한 보물과도 같았다.
가리마와 나는 지난해 8월 15일 광복절 이후로 더욱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인도와 한국은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공통점이 있는 데다가, 알고 보니 인도의 독립기념일과 한국의 광복절은 같은 날이었다. 그녀가 준비한 다채로운 카레 요리와 특유의 향신료를 가미한 인도식 밀크티를 나누며 우리는 고국의 독립을 함께 축하했다. 아일랜드에서 한국 사람이 아닌 또 다른 아시아인과 마음을 나눌 수 있어서 더없이 기쁜 순간이었다.
저마다의 가치관과 열정을 가지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들 틈에서 한국 엄마인 나의 좌표를 찍어보자면 그저 중간 어디쯤이 아닐까 싶다. 아일랜드에서 만난 엄마 대부분은 한국이 치열한 경쟁사회이고, 한국의 학생들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며 살아가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그런 선입관을 감안하자면 나는 그야말로 적당히, 대충 아이들을 방임하는 엄마로 보일 것이다.
5학년이 되어도 구구단을 외우는 것보다 밖에서 실컷 뛰어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리쉬 에이브릴과 굳이 비교하면 오히려 내가 극성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하루에 무조건 서른 개 이상은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고 악기 학원, 미술 학원을 필수라고 생각하는 이웃의 중국 엄마와 비교하면 적당히 느슨하고 게으른 엄마가 분명하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교육하더라도 친밀한 관계만은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서로 사이가 나빠지면서까지 억지로 강요하거나 시키는 것을 피하려다 보니 가끔은 이도 저도 아닌 맹탕 엄마가 된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날 때도 있지만, 아일랜드의 환경이 공부에 있어서는 한국보다 굉장히 여유로운 편이어서 다른 엄마들이 어떻게 하는지 눈치를 보기보다는 그들의 장점 하나씩이라도 배워가자는 것이 그나마 나의 욕심이다.
소녀들의 엄마 평가는 그저 작은 해프닝으로 지나갔지만 엄마인 내게는 많은 고민과 숙제를 떠 안겨 주었다. 아주 작은 점수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나 자신을 돌아볼수록 아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커져만 갔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점수로 당연한 듯 아이들을 판단하고 다그쳐왔을까.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된 크고 작은 시험과 학기마다 주어지는 평가, 그리고 성적표에 찍힌 별표의 개수.
"지난주 영어 스펠링 시험은 몇 점이었어?"
겉으로는 일희일비하지 않는 척, 비교하지 않는 쿨한 엄마처럼 지나가듯 아이에게 물어보았지만, 곧이어 "다른 애들은 얼마나 맞았니?" 하면서 은근슬쩍 비교의 근거를 찾곤 했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보다는 시험과 숙제가 덜하다는 이유로 '너희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왜 모르냐’면서 '너무 많이 놀아서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녀석들을 몰아붙일 때도 많았다.
어느새 내 안에는 점수와 상대적 비교로 아이들을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앵그리 지수로 엄마들을 비교했다는 사실 하나에 속으로는 얼마나 당황했던가.
아이를 키우면서 무심코 했던 말과 행동들을 정작 나 자신은 쉽게 잊어버리곤 하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마치 카메라처럼 인상적인 기억들이 차곡차곡 저장되어 왔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자라고 저마다의 가치관이 형성될수록 어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결은 더 날카롭고 촘촘해질 테고, 굳이 점수를 매기지 않더라도 내 앞에 서 있는 어른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는 능력도 쑥쑥 자라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돼. 비교하는 건 좋지 않은 거야.”
비교, 점수, 평가로 점철된 시스템 안에 아이들을 가둬둔 어른들이 이런 말을 건넬 자격이 있을까. 잘하든 못하든 그저 네가 행복하면 다 괜찮다고 다독이면서도 누구보다 뛰어나면 마음으로 우쭐대고, 누구에게 뒤떨어지면 조바심에 휩싸이는 소심한 나 자신조차 중심을 못 잡고 갈팡질팡 할 때가 많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딸아이와 친구들이 세속적인 기준으로 엄마들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봐주었다는 점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우리를 좀 더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세요."라는 간절한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감정을 배설하듯 앞에 있는 아이에게 생각 없이 화를 내고 날카로운 말을 내뱉고 돌아섰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것을 받아 든 아이의 일그러진 표정과 속상함에 잠 못 이뤘을 그 밤을 이제야 더듬더듬 되짚어본다. 돌아보면 나의 어린 시절에도 그런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이를 손님처럼 대하라' 했던 어떤 여성학자의 말이 문득 생각난다. 아이와 엄마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채 아이의 속으로 들어가 집착하고 휘젓고 싶어 질 때마다 이 말을 되새겨야 겠다. 내게 좋은 점수를 주었던 딸아이의 친구들을 대하듯 온화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연습도 더 자주 해야할 것 같다.
아이에게 더 좋은 점수를 얻고 싶어서가 아니다. 아이들이 그런 비교놀이로 어른들을 굳이 흉내내는 것보다 더 즐겁고 의미있는 비밀 이야기로 소중한 유년시절을 채워가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녀석들의 웃음을 가끔씩 비춰주는 따뜻한 햇살로 남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