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 바리스타 Paul과 플로리스트 Daisy의 컬래버레이션
"OOO님, 배달 왔습니다."
어느 날, 회사로 커다란 꽃다발이 배송되었다.
전문 택배원이라고 보기 어려운 한 여성이 회사 문 앞에서 두리번 대고 있었다.
회사원에게 식곤증이 몰려오는 때, 시계는 오후 2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뜨고 있는 내게 다른 사람의 말소리가 잘 들릴 리가 없었다.
웅얼웅얼... 웅얼웅얼...
나의 상체는 의자 등받이에서 떨어지며 컴퓨터 책상 앞으로 점점 더 고꾸라지고 있었다.
알파벳 C 모양으로 수렴해 가는 척추, 7번 척추서부터 위를 타고 올라오는 피로감,
결국 공처럼 말리고 마는 어깨, 그리고 거북이처럼 굽는 목.
"OO님! 안 계신가요?"
나는 몽롱한 상태에서 파티션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엉거주춤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여자 배달원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앞치마를 두른 차림새로 보아 언뜻 보기에도 그녀는 '꽃집 사장님' 같았다.
"전데요... 저한테 온 거라고요...? 누가 보낸 거예요?"
"안에 보시면 카드가 있어요. 선물하신 분 성함이 적혀 있을 거예요."
그녀는 의미심장한 말로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엷은 미소로 내게 화답한 뒤, 도망치듯 회사를 빠져나갔다.
꽃을 '보낸 사람'과 밀담을 먼저 나눈 그녀에게서 마지막까지 비밀 지령을 수행하리라는 사명감이 엿보였다.
그녀를 통해서 꽃 선물은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만든 사람'에게도 희열을 느끼게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갑작스레 분홍색 발레핏 리본과 하얀색 손잡이가 달린 종이 박스를 건네받으니, 잠이 싹 달아났다.
연두색 빛이 도는 묘한 흰색의 리시안셔스와 연분홍색의 거베라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들이 우아한 무대의 화려한 주역이 되어 있는 듯했다.
남편이 꽃다발을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참, 갑자기 뭘 이런 것까지 보냈어~'
꽃이 배송된 시점이 7월 말인 걸 감안하면, 꽃다발이 온전한 상태로 피어 있는 것이 놀라웠다.
여름 더위와 함께 장마가 시작되어, 그날은 비가 무섭게도 많이 내렸기 때문이다.
사무실 차창을 타닥타닥 때리는 소리가 거셌는데, 그 비를 뚫고 온 사장님의 열정도 참으로 대단했다.
'이 꽃이 지금도 나오네…? 원예 재배도 사시사철 잘 되나 보군?'
부끄러움이 많은 남편은 사랑 표현이 쑥스러워서인지 나에게 먼저 꽃다발을 선물한 적이 ‘거의’ 없다.
기억나는 건 처음 사귀자고 고백할 때, 그때 한 번 정도?
데이트하면서 꽃다발을 들고 돌아다닐 때,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부담스럽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을 향한 나의 마음은 갈대 같다.
막상 꽃을 받으면 로맨스지수가 치사량에 달한다. 사랑받고 있는 내 모습에 또 한 번 취한다.
꽃다발 안에는 흰색 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겉면에는 'Paul & Daisy'라고 이탤릭체의 은색 글씨가 멋들어지게 쓰여 있었다.
나는 카드를 열어보고 나서야, 꽃다발을 선물한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속았다!
"이제는 과장님인 OO대리님 새로운 시작을 축하드립니다.
이번 승진을 계기로 하는 일 모두 성취하는 해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영원한 최애, 최애이고 싶은 후배 OO드림."
회사 근처에 있는 꽃집을 검색해서 또 내가 좋아할 만한 종류로 골랐다?
그럼 그렇지... 우리 남편은 이런 거 할 줄 모르지…
역시 OO의 아이디어였어! 보통 센스가 좋은 친구가 아닐 수 없다.
후배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낸 뒤, 꽃집 사장님의 인상이 좋아서 다른 팀원들에게도 이곳을 추천했다.
"오, 여기 괜찮네요! 저도 여자친구 생일에 여기서 살래요. 어디 있는 가게예요?"
"회사에서 먼가? 오다가다 못 본 것 같은데... 지도에서 한 번 찾아봐야겠다!"
며칠 뒤, 회사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폴앤데이지' 꽃집을 찾아 나섰다.
배도 꺼뜨리고 바깥공기도 쐴 겸해서 사무실을 벗어날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였다.
건물 밖을 나서서 하늘을 쳐다보고만 있어도 몸에서 비타민이 솟구쳐 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숨 쉬면서 광합성하는 생명체가 된 거야!!!'
그런데 커피도 한 잔 하고 싶었다. 직장인에게 역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필수 에너지원이니까.
꽃구경만 잠깐하고 그 옆 상가에 있는 카페를 찾아 자리를 옮길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라? 주상복합 아파트 1층 필로티 상가에 위치한 가게. '폴앤데이지'가 맞았다!
꽃집에서 카페도 운영하고 있던 것이다. 아니면 카페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칙칙한 회색빛 건물 안에서도 그 가게만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특별해 보였다.
가게 벽면은 산뜻하고 포근한 연노랑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안팎으로는 몬스테라와 테이블야자 등 이름 모를 초록색 식물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하얀색 파라솔과 의자들이 펼쳐져 있고, 사람들이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노랑, 초록, 하얀. 세 가지 대비되는 색감이 묘하게 잘 어우러졌다.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가 떠오른달까?
이곳에서 유럽 카페 거리의 정취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혼자 있는 사람도, 일행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표정이 한껏 여유로워 보였다.
가게의 내부로 들어서니, 왼편에는 생화들이 유리선반 가득 종류별로 보관되어 있었다.
나처럼 누군가의 손에 꽃들이 들려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고는 웃음이 지어졌다.
내게 꽃을 배달해 준 여자 사장님은 꽃다발을 만들고 있었다.
파스텔톤의 하늘색, 보라색, 주황색의 꽃들에서도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색다른 매력을 발견했다.
꽃 작업대 반대편, 가게의 오른편에는 남자 사장님이 커피 제조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첫 방문 고객인 내게도 귀를 열어두며 일정 수준으로 관심을 표현했다.
시그니처 메뉴가 눈에 띄었다. 총 3가지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모두 '아인슈페너' 종류의 커피였다.
아메리카노나 라테 위에 아몬드나 연유 크림을 얹은 음료로 꽤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나는 가게 콘셉트에 충실한 시그니처 커피 메뉴의 이름에 더 흥미가 갔다.
폴 A, 폴 B, 폴 C! 자기를 커피 브랜드 그 자체로 도배하고 있지 않은가?
주인장의 이름 걸고 당당히 영업하는 가게는 나도 모르게 맛에 대한 신뢰감이 생겨 난다.
'이 집은 Paul 씨가 바리스타로구만. 그럼 플로리스트가 Daisy 씨인가?'
역시나 둘의 조화는 환상적이었다. 은은한 꽃 향과 고소한 원두 맛이 잘 어우러졌다.
사무실이 답답하게 느껴지면서 특별한 이유 없이 멜랑꼴리 할 때면, 이곳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저기서 일하면 능률이 더 올라갈 텐데… 컴퓨터 떼 가지고 나가면 안 되나?'
유럽에 와 있다는 자기 최면에 걸려서 인지, 집중력 있는 독서와 허물없는 대화가 가능해진다.
생각이 우주처럼 끝없이 팽창한다. 마음이 넓어지고 또 자유로워진다.
"너도? 하... 우리 폴앤데이지나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