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칠과 한국 현대 철학 읽기 (슬기네 집)
“自由
自由、獨立의 精神的基盤
우리는 自由를 위하여 싸우고 있다.人類의 歴史는 한말로 요약한다면 결국 자유를 위한 투정史라 할 것이다.
맑스는 歴史를 支配階級 被支配階級의 투쟁史로 보았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唯物論的으로 說明하여 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自由’를 위한 투쟁사 있다. 支配階級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自由’를 뺏길가 두려워서, 被支配階級은 物質的 精神的 不自由에서 해방받기 위하여 싸운 것이었다. 이것은 根本에 있어서 物價보다도 정신문제였다. 속담에 ‘편한 개팔자’를 비웃는 것도 그런데서 나온 것이다. 물론 사람이 몹시 배고프고 고생스러우면 종노릇 하면서라도 생활에 어느 정도 安定性 가지 기를 원하는 것도 사실이다. 구약에 『에서』가 팟죽 한 그릇에 長子의 직분을 팔았다는 이야기든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四十년의 고생에서 몇번이고 애급에 도라가 종노릇 하면서 떡 먹고 고기 먹기를 원하던 이야기라든지가 다 그런 인간의 ‘약점’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물적’인 인간으로서의 ‘약점’이요 결코 ‘人格的인 人間’으로서가의 ‘本然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페트릭 헨리가 ‘내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 한 비통한 부르짖음은 결국 모든 인간의 속깊은 本心의 부르짖음을 代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재준, 『계시와 증언』 (서울: 새사람사, 1956), 9~10쪽.)
나의 독후감
동학 혁명은 우리에게 ‘자유’를 위한 외침으로 남았다. 그 외침은 누군가를 향하여 외침이라기보다 일종의 다짐이었다. 자유를 달라는 누군가를 향한 외침이 아니라, 자유로워야겠다는 자기 자신을 향한 다짐 말이다. 그 다짐은 개인으로 나의 자유에 한정되지만은 않는다. 만일 나 한 사람의 자유만을 위한 외침이라면 그 자유는 그 개인에겐 좋을 수 있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이에겐 나쁠 수 있다. 그러니 그 자유는 ‘나’란 ‘홀로 있음의 자유’가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 모두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우리’란 ‘더불어 있음의 자유’였다. 나 하나만을 위한 좋음을 위해 사는 ‘자유’가 아니라, 서로에게 기꺼이 뜻있는 누군가가 되기 위해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좋음을 위해 살아가는 그런 자유 말이다.
그런데 우린 그런 자유가 없었다. 자유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 양반이란 주인의 도구로 존재하는 노비에게 자유란 무엇일까? 양반은 노비와 더불어 사는 존재가 아니라. 노비를 향한 양반의 명령을 두고 대화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대화는 만남을 전제로 한다. 만남은 ‘있음의 일의성’, 즉 ‘있음의 평등’에서 가능하다. 그 평등에서 서로는 서로의 생각을 자유로이 주고받으며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간다. 하지만 양반과 노비 사이엔 그런 만남도 그런 자유도 없었다. 친일파와 일제강점기 일본 역시 이 땅의 민중, 이 땅의 씨알과 더불어 살지 않았다. 만나지도 않고 대화하지도 않았다. 그저 명령했다. 이 땅 귀하디 귀한 소녀도 그들에겐 별것 아닌 소비의 대상이었고, 이 땅 귀하디 귀한 소년은 그들에게 자신을 위해 죽어야 하는 총알받이였다. 독재의 시대, 독재자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런 시대, 그저 홀로 좋음을 위해 홀로 자유를 누리겠다는 이는 더불어 사는 이의 눈물 따위는 더불어 품지 않고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홀로 누릴 것을 누리며 살았다. 그리고 그 시대, 이 땅의 씨알은 우리 가운데 너는 나에게 남이 아니라 서로를 품으며 살았다. 동학 혁명의 길, 죽을 줄 알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모두의 자유를 위해 죽창을 든 지금 누구도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누군가의 온 생명 다 건 외침을 기억해 보자. 일제강점기, 죽을지 알지만 초라한 무기 들고 일본의 힘에 온 생명 던져 싸운 그 외침을 기억해 보자. 돈이 지배하는 시대, 착취가 일상인 시대, 여공의 아픔을 남의 아픔이라 두지 않으며 온 생명에 불을 지르고 시대의 횃불이 된 전태일을 기억해 보자. 그들이 외침 그 자유는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더 큰 울림의 다짐이 되었다. 우린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는 自由를 위하여 싸우고 있다. 人類의 歴史는 한말로 요약한다면 결국 자유를 위한 투정史라 할 것이다.” 김재준 목사의 말처럼, 지난 우리의 역사는 한마디로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그 투쟁이 실패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울림은 더 큰 울림으로 우리 씨알 가운데 다짐이 되어 박혔다. 그리고 그 다짐이 느리지만 서서히 이 땅 역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사람이 몹시 배고프고 고생스러우면 종노릇 하면서라도 생활에 어느 정도 安定性 가지 기를 원하는 것도 사실이다. 구약에 『에서』가 팟죽 한 그릇에 長子의 직분을 팔았다는 이야기든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四十년의 고생에서 몇 번이고 애급에 도라가 종노릇 하면서 떡 먹고 고기 먹기를 원하던 이야기라든지가 다 그런 인간의 ‘약점’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물적’인 인간으로서의 ‘약점’이요 결코 ‘人格的인 人間’으로서가의 ‘本然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페트릭 헨리가 ‘내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 한 비통한 부르짖음은 결국 모든 인간의 속 깊은 本心의 부르짖음을 代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몸을 가진 우리는 배고픔의 고난을 극복하기 쉽지 않다. ‘편한 개팔자’가 되어서라도, 배부르게 살고 싶다. 거기 조금 더 솔직해지면, 나만 더 배부르게 살고 싶다. 적당히 남의 부러움을 사면서 살고 싶단 말이다. 바로 그게 ‘홀로 있음’의 모습이고, ‘홀로 있음’의 약점이다. 그러나 그 ‘홀로 있음’이 아무리 ‘더불어 있음’, 즉 ‘우리’를 흩어지게 한다고 해도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모습은 ‘더불어 있음’ 가운데 살아감이다. 우리 가운데 너와 더불어 나는 살고자 한다. 더불어 살기 위해 우린 ‘홀로 있음’을 벗어나 참자유를 다짐해야 한다. 돈과 권력에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리는 자유를 누군가에게 구걸하지 않고 우리네 다짐으로 이룰 수 있다. 그리고 돈과 권력의 눈으로 너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너를 만나 너와 참된 우리를 이룰 수 있다.
돌아보고 돌아보자. 나는 지금 홀로 누리고자 하는가! 나는 권력을 가진 나쁜 놈의 대리인이 되어, 그들의 종이 되어, 홀로 조금 더 많이 누리고자 하는 건 아닌가! 나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를 돈이나 권력에서 자유로운 시선으로 만나고 있는가! 나는 우리 가운데 너를 만나 너와 더불어 우리를 이루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도 자유를 다짐하고 있는가! 김재준 목사의 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유대칠
2024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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