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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un 09. 2024

종교는 밖이 아닌 안의 일이다.

더불어 있음의 종교철학

더불어 있음의 종교철학    


종교 역시 사람의 일이다. 사람 밖의 일이 아니라, 사람 안의 일이다. 만일 사람 밖의 일이라면 종교는 사람에게 뜻을 품지 못한다. 종교가 사람에게 뜻을 품는 것은 종교가 사람 안의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착각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종교가 사람 밖의 일이라 스스로 정의한 거다. 그러니 그들은 사람에게 뜻을 품으려 존재하기보다 사람 밖을 향했고 이를 듣기 좋은 말로 ‘초월성(transcendence)’이라 포장했다. 그러나 종교의 첫 시작에서 그 마지막까지 종교는 항상 사람 안에 머물러야 한다. 즉 ‘내재성(immanence)’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재성에서 멀어질수록 사람의 옆에서 멀어지고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혹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얻는 관념의 가치를 높이게 되었다. 예를 들어, 나눔 없는 가난이 그렇다. 막상 거대한 재산을 가지고 화려하게 살아가면서 나눔은 많지 않다. 병원 등 엄청난 재력을 얻을 수 있는 사업으로 돈을 쌓아두지만, 막상 그 병원이 있는 곳 가난한 이들은 그 종교 정신의 가난으로 운영된다는 병원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굳이 병원뿐 아니라, 곳곳에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결국 100을 벌어 0.001을 나누면서 나눔이라 하고 그저 과소비하지 않고 살기에 청빈이라 자기들끼리 자기 만족하며 가난 없이 사는 거다. 말로는 그러한 삶이 이 땅의 욕심 밖, 사람의 밖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매우 교활한 방식으로 이 땅의 방식으로 그것도 매우 이기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다.      


종교가 사람 안의 일이라면 그 사람 안의 일은 이기심의 밖에서 이루어지는 사람 안의 일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종교는 스스로 사람 밖의 일이라면서 스스로는 매우 이기적인 방식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니 종교는 그들 안에선 좋은 공동체이지만, 그 종교의 밖에선 그저 보통의 기업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자기 방식으로 이득을 추구하는 그런 기업 말이다.      


종교 역시 보통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집합체(collective)’다. 그 집합체는 독재자의 공간에 존재하는 무리가 아니다. 더 성스럽거나 홀로 능동적인 어떤 존재가 있어 그만이 온전히 능동적이며 다른 모든 것을 그와의 거리 속에서 위계의 지위를 가지고 하위의 지위를 가진 이를 지배하는 그런 독재자의 공간에서 작동되는 무리가 아니다. ‘집합체’는 단지 ‘사람’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자연의 모든 것’과 심지어 ‘개념’ 그리고 이런저런 온갖 ‘프로세스’ 등으로 이루어진다. 말 그대로 다양성을 이루는 모든 것이며, 이들 각각은 스스로 행위하거나 타자가 행위하도록 하는 ‘행위소(actants)’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한다. 집합체를 가능하게 하는 ‘연결(connections)’은 다양한 존재의 ‘결합(association)’으로 이루어진다. 그 결합은 당연히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구조 속으로 통합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양한 행위소 사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루어지는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종교 역시 그렇다면, 사람 안의 것이고, 사람이 그 가운데 살아가는 곳이라면, 결국 종교도 ‘집합체’이고 이는 다양한 ‘행위소’가 더불어 있는 곳이고, 더불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곳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종교는 영향을 주고 이는 한정되고 있고 그 영향을 능동적으로 주는 이의 말을 듣는 다수의 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서로 생각하며 서로 만나고 대화하는 장보다는 교육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앞선다. 교육으로 어느 수준에 이르렀을 때 대화하겠다는 차가운 세계관은 성직자만이 능동적 존재이고 신의 말을 제대로 듣는 유일한 정신이라 자만하도록 만들었고, 성직자 아닌 이들은 수동적으로 성직자의 입만 바라보며 귀를 열어야 하는 수동적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즉 행위자는 오직 성직자이며 다른 이는 그 행위자의 말에 움직이는 생각도 생명도 없이 명령에 움직이는 무엇이 되어 버린 거다.     


하지만 종교는 이러한 차가운 위계의 구조를 특유의 낭만화로 미화(美化)하였다. 그리고 이런 미화는 결국 많은 이들의 탈 종교화를 권하는 결과를 낳았다. 


유대칠 씀



부석사에서 (사진 유대칠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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