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mmer Bom May 29. 2022

<소설가의 영화> 홍상수

딱히 영화 리뷰는 아닌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면 반응은 두 가지다.

가장 많은, 그의 사생활에 인상 찌푸리는 유형. 그들은 대부분 홍상수 영화를 한 편도 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술 마시면서 여자한테 껄떡대는 찌질남들의 영화라는 인식이 더해져서 그를 저질 감독이라 말한다. 사실과 다르진 않으니 그것도 그대로 존중이다. 정치인에게도 그렇듯 으레 도덕적인 면이 훨씬 중요한 우리 정서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나 또한 몇몇 남배우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끼니까.

두 번째는 오 너도 좋아해? 그래 우리 얘기해보자 유형. 이 경우에도 찌질한 남자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으로 얘기가 시작된다. 나도 그렇게 표면적인 얘기를 같이 하고는 마는데, 더 깊은 얘기를 하기엔 나도 깊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저 평론가들이 남긴 후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


난 왜 이 사람 영화를 좋아할까.

내게 홍상수 영화는 어렵지 않고 굉장히 단순하게 느껴진다. 하고자 하는 말을 숨기없이 그대로 내뱉고, 조금씩 다르게 변주하며 같은 말을 한다.

<그 후>에서는 '왜 사세요?'라는 극 중 초반의 질문이 전부였고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서는 '절 아세요?'의 변주였다.

이번 <소설가의 영화>에서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니야'가 전부.

작위적인 것들은 모두 잠깐이고, 사람 그 자체와 온전한 사람들끼리 우연히 부딪힐 때 나오는 사소함들이 전부라고 말하는 듯하다.


예술가의 할 일은 질문이고, 아무도 불편하고 귀찮아서 파헤치지 않을 것에 다가간다. 그건 진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우리 모두 그렇지 않나. 몇 번 사랑을 반복하면서 뱉은 '사랑한다'는 말이 상대방에게 하는 말이었는지, 나에게 하는 말이었는지, 아니면 그 시절에 하는 말이었는지, 아니 애초에 그 말은 뭔데?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겨우내 붙잡는 말 뿐인 것은 아니었는지.

말로 간신이 이어져가는 지난날들에 허탈함을 느낄 때마다, 그걸 깨달을 때마다 거기에 가까이 다가가는 게 두려웠다. 그 허탈함이 진짜이면 어쩌지, 그걸 인정해버리면 모든 것이 소용이 없다는 허무주의에 빠져버릴까 봐.

홍상수 영화는 그걸 딛고 일어서자, 우리는 사랑을 하자, 라는 희망을 얘기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렇다고,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 어쩌라고. 가장 강인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나는 배우가 아니다. 그 사실을 알기까지 오래 걸렸다. 주인공인 것처럼 연기하며 살뿐이다.


나는 살아있는 무대이며, 다양한 배우들이 다른 역할을 연기하면서 그 위를 지나간다.
- 페르난두 페소아



<소설가의 영화>는 영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담백함을 표현한 것 같다.

그게 소설 내에서 말하는 '맑아졌다'로 표현되는 것과 비슷할 것 같다.

색채도 없이 기교도 없이, 스토리도 없고 대사가 주는 힘도 없이. 무슨 재미로 이 영화를 봐야 하냐고 딱 한 가지만 꼽으라면, 나의 인생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그저 매일 가는 공원에서 들꽃을 한 송이 두 송이 줍다가 아 예쁘다- 하는 그거면 되는 것이 전부인 게 아무렇지도 않다면. 재밌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Anne With En E> by Netflix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