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적 글쓰기, 엘렌 식수를 꼭꼭 씹어 삼키기
화제의 이름, 엘렌 식수를 읽었다. 리스펙토르를 너무나 사랑하고, 카프카를 내내 껴안고 키스하는 식수. 나는 책을 좋아하다가, 작가를 좋아하다가, 글을 좋아하다가 이 책까지 와버렸다. 글쓰기나 작법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으나 그 세계가 좋아 가까이 가다 보니 이 무서운 책에 이르렀다. 무서운 책은 내게 ‘글’과 ‘언어’를 알려주는 선생님이다. 자, 봐봐, 글이란 게 뭘까? 언어는? 글이라는 재료로 네가 얻고 싶은 건? 잃고 싶은 건? 너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
이 질문을 자꾸 마주하게 되면서 책장을 넘기기 힘들었다. 두려웠다. 글이 좋다고 말했을 뿐인데, 대단한 예술가가 되어야 할 것만 같았다. 내게 그만치의 재능이, 열정과 태도가 있는가,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어 메마른 입술만 뻐끔댔다. 애매모호한 재능, 애매모호한 마음. 이런 보잘것없는 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식수가 말하는 것만큼 나는 강할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건 글쓰기라는 행위에 관한 책입니다. (…) 그런 책은 저자보다 강한 책입니다. (…) 어떻게 쓰일 수 있을까요? 달리는 손으로요. (…) 열정이 일어나는 심장에서부터 생각하는 몸의 이야기를 듣는 손가락 끝까지. 거기서 ‘살아내는 책’은 솟아오르고요… (p278)”
식수의 글쓰기 강의를 옮겨 작성한 이 책,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은 책상에 마주 앉은 순진한 나를 은색 뿔테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올려다보며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너 정말 글을 쓸 수 있어? 이 작가들이 글이란 걸 어떻게 대했는지, 글을 써왔는지 네가 알아? 그래서 나는 읽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아니요… 죄송합니다… 기가 팍 죽었다.
우리를 상처 입히는 책, 우리를 벌벌 떨게 만들고, 얼굴을 붉히게 만들고,
피를 흘리게 만드는 책.
이건 우리 자신, 저자와의 전투입니다.
둘 중 하나는 정복되거나 죽어야 합니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기가 ‘죽어 있었다’. 식수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 책은 그의 말 그대로 독자(나)를 죽임으로써 쓰일 가치를 얻은 셈이다.
하지만 식수는 그렇게 못된 선생님이 아니다. 그는 찬찬히 자신이 지은 글쓰기 학교로 불러내 알려준다. 가장 먼저, ‘망자의 학교’에서 그리고 ‘꿈의 학교’로 갔다가 마지막에는 ‘뿌리의 학교’. 나는 이 학교에서 졸업할 수 있을까?
그는 학교 입학 때부터 단호하게 말한다. “글쓰기를 시작하려면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 지금 한창인, 현재의, 극심한, 신선한 죽음, 이날의 죽음, 오늘의 죽음이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두려워하지 않는 법, 다른 말로 하자면 삶의 극단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그게 망자들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라며 망자의 학교에서 첫인사말을 한다. 자, 우리 죽어봅시다. 죽임을 당해 봅시다.
“우리는 살해됩니다. (…) 당신의 사랑과 나의 사랑 사이에 살인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죽이는가? 나는 어느 살인자에게 나를 내맡기고 있는가?’ 모든 위대한 글은 이 질문에 사로잡힌 포로입니다. (p11)”
죽는다는 은유는 예술에서 흔히 쓰인다. “죽고자 하는 욕망은 알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사라지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고, 자살이 아닙니다. 향유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p66)” 개인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선 두려워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자아를 뛰어넘는, 본래의 자신을 뛰어넘”어야 한다. 자신을 그 가느다란 칼날 위에 데려다 놓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마침내 죽는 데에 성공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는가? 그 방법도 친절히 말해준다.
“가서 보기, 볼뿐만 아니라 우리라는 심연 쓰기. 자기 안에서 최악을 찾으려 애쓰고, 지우기의 과정이 없는 곳에서, 최악이 최악으로 남는 곳에서 털어놓기. (p81)”
글 쓰고자 하는 욕망은 식수가 말하는 죽고자하는 욕망과 같다. 마침내 모든 진실이라고, 스스로 발가벗겨지면 마침내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수수께끼 같은 순간에 도달하고자 욕망할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던 상태를, 완전히 발가벗은 채 살기를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뒤이은 식수의 고백에서 작은 위안을 얻었다. 그 또한 죽기를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자신도 죽음을 성공하고 싶다고.
“글쓰기는 고백할 수 없는 것을 고백하는 데 성공할지도 모르는,
정밀하고 까다롭고 위험한 수단입니다”
그리고 꿈으로 쓰는 꿈의 학교다. 언제나 식수 그 자신은 꿈을 질투한다고 말한다. 얼마나 낭만적인 말인지.
“꿈은 우리의 현실보다 강력하고, 약점에서나 강점에서나 더 거대합니다. 꿈에서 우리는 마법적인 존재가 되는데, 제가 제 꿈을 부러워해도 된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저는 가끔 제 꿈이 부럽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p156)”
식수를 알기 전, 작년 중순부터 나는 꿈을 메모해 왔다. 개념, 이론, 틀에 갇히기 거부하는 이 꿈에서 내 안의 메시지를 간절히 읽고 싶었다. 꿈에서 나는 시퍼런 칼을 들고 죽이도 했고, 속삭였고, 죽임도 당했다. 파랑새를 만났고 질투했고 고양이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다. 좀체 틀에 가둬지지 않는 이 꿈의 학교에서 글을 쓰라는 식수. 우리가 눈 뜨고 있을 때 하는 생각이라는 것은 곰곰이 돌이켜보면 나의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세상이 눈을 부라리며 말하는 법칙, 원리, 논리, 근거, 진리라는 것들, 정말 진리인가? 왜? 그렇다고 배워왔으니까. 그것이 겨우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식수는 그것을 ‘악마’라고 부르며 마음껏 불신하라고, 꿈을 더 가까이하라고 말한다.
““그냥”. 이것이 법칙의 논리입니다.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이 끔찍한 ‘그냥’, 이 무의미하고 치명적인 ‘그냥’입니다. (p205)”
“우리는 꿈을 꿈으로 취급하는 법을, 꿈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법을, 꿈을 파괴하는 모든 내적 외적 악마들을 불신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p189)”
그리고 이제 한없이 아래로 깊게 내려가라고 한다. 저 위에 이데아로 이름 지어진, 절대 진리라고 불리는 것들을 내버려 두고 어둑하고 습한 곳으로, 자궁으로, 자궁이 없다면 어딘가 다른 곳으로.
“우리의 무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비겁함, 우리의 공포”가 그걸 가로막겠지만, 그래서 “딱히 유쾌하지 않은 곳들을 통과해야만”하겠지만, 사실 고되게 넘어갈 경계는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없다는 것을 알면, 두렵지 않을 것이다.
“누가 경계를 발명했나요? 경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p231)”
그렇다면 어떻게? 식수는 또 알려준다.
“우리의 몸이 이 질문의 장소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의 꽃 부분은 어떨까요? 저는 여기에 이 질문을 심어 자라게 할 작정입니다. (p234)”
“무의식과 동일한 질서를 가졌으나 언어 이전의 것인 몸의 신호 (p240)”
몸, 내부. 몸이라고 부르지만 그보다 더 심연의 몸, 뿌리. “지구와 지구의 성분을 몸 안에서, 상상 속에서, 사고 속에서 다시 통합하는 극도로 어려운 영적 훈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기원이라고. 식수는 우리의 기원을 ‘꽃’이라고 말한다.
“기원을 향한 여행에는, 뿌리로, 우리가 세상의 구성에 관해 자연 과학에서 배운 것으로 복귀하는 길에는 유사한 단계들이 있습니다. 동물의 상태를 지나는 통로가 있고, 그러고는 식물의 상태를 지나는 통로가 있고, 그렇게 우리는 인류에게서 멀어집니다. (…) 우리는 땅 속으로 내려갑니다. 줄기를 지나, 뿌리를 지나, 그러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새기지만 우리에 관계하지 않은 것에, 우리가 해체를, 분해를 겨냥하고 있으니 결합하지는 않지만 광물적 질서를 지닌 것에 닿습니다. 아마도 꽃이 우리의 마지막 인간적 단계일 것입니다. (p268)”
꽃이라니, 너무 단순하지 않나? 처음 마주했을 땐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읽다 보니 꽃만큼 적절한 것이 없다는 경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 식물에 꽃이 피기 위해서는 먼저 단단히 뿌리를 내려야 한다. 암술과 수술이 만나 과정이 이루어진다. 수술은 자기 소임을 마치면 ‘죽어야 한다’. 아래로 내려오면 암술이 위로 부상하며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열매가 맺히면 암술도 죽는다. 이 모든 건 우리가 자고 일어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식물대에서 수많은 죽음과 탄생이 있는 것이다.
글을 대하는 식수의 마음이 너무나 애틋하여 나 또한 이 글을 조심스럽게, 애착하는 눈으로 읽게 된다. 하지만 어려운 책이다. 여러 번 읽어도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번역되거나 읽히지 않는 작가들과 작품이 많이 소개되어 낯설었다. 그래서 좋은 점은 토막으로나마 번역되어 식수의 해석과 함께 읽을 수 있어서 기쁘기도 했다.
‘여성적 글쓰기’라는 말이 유행(?)인 듯하다. 여성이라는 대표 성이 붙은 이유는 페미니즘이 바꿔온 인식과 실천을 토대로 쌓아 올려졌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어떻게 쓸 수 있는가? 남성화되어 있는 언어, 사고, 이념, 이론을 여성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하며 다르게 볼 수 있는가?
다시 엘렌 식수가 읽히는 이유는 그가 제시한, 망자, 꿈, 뿌리로 쓰는 것과 그런 작가들이 이미 있었다는 걸 우리는 보면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다 읽고 나서는 주눅 들던 마음에서 겸허하고 감사해졌다. 먼저 온몸을 불살라 실천해 준 작가들이 있고 해석이 있고 방법이 있다. 안심이 되었다. 또 이렇게 기쁘게 빚진 채로 꿀꺽꿀꺽 받아먹는다.
우리는 일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대지에서.
대지가 되는 시점까지 말입니다.
비천한 일입니다. 보상도 없지요. 기쁨 말고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