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자연 앞에서
<햄넷>을 예술에 대한 영화라고 하기엔 아쉽다. 셰익스피어가 아닌 잊혀진 아내, 아녜스의 서사를 여성 작가와 여성 감독이 남근이 아닌 포궁 중심으로 볼 수 있도록 다분히 의도한 연출에 몰입해서 영화를 보았다.
윌은 아녜스가 출산을 하자마자 급격히 쇠약해져 간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떠나 안전하게 창작을 하기 위해 가족을 두고 런던으로 떠난다.
그가 아버지에게 줄곧 ‘쓸모없는 놈’이라는 말을 들어서? 아니, 그는 포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정신병을 결코 펄떡이는 생명을, 자연을, 만들어낼 수 없는 남근의 열등감과 열패감으로 보았다. 이는 영화에서 명확한 은유로도 드러난다. 커다란 숲에서 태아처럼 웅크린 아녜스, 그 숲에서 첫 아이를 혼자서 야성으로 출산하는 아녜스, 그리고 그 아이를 뒤늦게 안아 들고는 나무 옆에 난 커다란 동굴 같은 구멍을 뚫어지게 보는 윌. 숲은 포궁이며 동굴은 아이가 나오는 통로, 질이다. 자연(Mather Nature)만이 가진 것, 하지만 자연의 일부인 남성에게는 없는 것. 그래서 괴로워하던 윌. 나도 낳고 싶어, 태어나게 하고 싶어, 없었던 새로운 것을, 펄떡이는 생명을, 나도 이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어. 그의 씨앗이자 생명력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무언가 태어날 것이다.
흔히 창작을 출산에 비유한다. 영화는 창작자가 낳은 아기이다. 그러나 예술은 결코 생보다 위대할 수 없다. 아녜스의 적나라한 출산 장면은 포궁, 생명, 자연이 하나임을 보여주고 있고, 그를 연기한 제시 버클리가 뿜어내는 야성미 덕분에 고스란히 감각할 수 있다.
야성. 짐승. 날 것. 영화에서는 그 자연을 경외하는 동시에 질척거리고 무섭게 그린다. 역사에서는 여성이 자연과 더 밀착할수록 아녜스에게 그랬듯 ‘마녀’라고 불렀다. 그들은 두려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이를 조건 없이 품었다가 아무 이유 없이 빼앗기도 하는 가차 없는 자연, 생명.
그래서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대적할 수 없는 자연에 순응하는 방법으로써. 기억을 추억으로 치환시키고 죽은 이를 추모한다. 윌리엄이 아들 햄넷을 추모하려 희곡 <햄릿>을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 이 상상의 이야기는 그래서 가짜임에도 진실되다고 받아들여진다. 예술은 언제나 가짜며, 진실을 빚으려 애쓰는 일이다.
윌이, 예술이 닿으려는 곳은 어디일까. 아마 우리 심장 저 깊은 곳, 내 배꼽과 연결되었던 곳, 조용히 들어보면 심장 박동 외에는 아무 이야기가 없던 곳. 그래서 가장 안전했던 곳.
영화는 자연에서 출발해 예술 무대 위의 이야기로 끝이 난다. 무작위로 주어지는 고통을 우리는 파괴할 수도 정복할 수도 없다. 고작 예술을 할 뿐. 그렇게 서로에게 손을 뻗는 일이 전부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