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집은 꽉 차있는걸 좋아할거야. <센티멘탈 밸류>

나는 집이, 당신이 필요해요.

by Summer

다른 영화들 다 제쳐두고 <센티멘탈 밸류>만 매주, 네 번 보았다. 이제 그만 멈출까 해…. 각본집과 체호프를 다시 읽으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유사하다는 <햄넷>을 보며 감정을 가지런히 닦으며(햄넷은 이용당했다), 간간히 썼던 단상을 수습할 수 있게 되었다.


집이 묘사되는 인트로부터 눈물이 터졌다. 인격화된 ‘집’은 노라의 ‘마음’이었고 내 마음 같기도 했다. “집(마음)은 간지럼을 탈까? 집(마음)은 아픔을 느낄까? 집(마음)은 비어있는 걸 좋아할까, 꽉 차 있는 걸 좋아할까? 아빠가 떠나며 집(마음)에는 부모님이 만든 소음은 사라졌지만 아빠가 만든 다른 소리를 그리워했다.”


마찬가지로, “나는 집이 필요해요”는 “나는 꽉 차 있던 때를 그리워해요. 나는 당신이 만든 소음과 상처마저 필요해요. 나는 당신이, 우리가 필요해요.”이다. 이런 말을 하기에는 부끄러워지는 나이가 되어서는, 술에 취한 어느 밤에 침대 맡에 엎드려 허공에다 뱉을 수밖에. 그리고 다시 내가 들을 수밖에 없어진다.




#영화와 연극

인물과 주제만으로도 며칠 내내 울고 불며 떠들 수도 있고, 대사를 각본집과 비교하며 씹고 뜯으며 뭐가 더 좋았을까 상상할 수도 있고, 영화와 연극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논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엔 다 제쳐두고, 하, 그나저나, 예술 개 좋아, 하고 탄식을 했다. Sentimental Value(감정적 가치)의 의미가 적어도 나에겐 완전히 닿았다.


구스타브는 연극을 봐줄 수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집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레이첼과 노라의 중요한 독백 장면은 희곡 그 자체다. ‘독백’은 희곡 언어다. 영화는 스크린 앞에 관객이 없다고 상정하고 관객도 그렇게 믿어주면서 가상의 세계를 그려내는 반면, 연극은 배우가 눈앞에 관객을 향해 몸을 뚫고 나올 수 있다. 당신, 연극이란 걸 보고 있지? 나를 보고 있지?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그래서 영화배우인 레이첼은 독백 속의 상대, “You”가 누구인지를 궁금해하지만 연극배우인 노라는 거침없이 읊는다. 구스타브가 연극배우인 자신의 딸을 위해 각본을 썼다는 진실성을 그 대사로 확인할 수 있다.

희곡 대문호인 체호프 얘기가 두 번 나오는데, 그가 그러한 작법을 희곡에서 처음 사용한 작가이라 추측한다. 노라가 예술 학교 오디션에서 ‘니나’를 연기하는 체호프 갈매기는 기존 희곡의 문법과 형식을 넘어서 직접 ‘예술’과 ‘연극’을 논하는 연극이란 점에서 이 영화와도 닿아있다.



#그림자를 그리는 눈

구스타브의 “그림자보다 아름다운 것 없다”는 영화가 집을 그려내는 중요한 시각이다. 인트로에서 카메라는 마치 햇살이 된 것 같다. 주택의 빨간 외벽, 덩굴로 덮인 흰색 창틀, 주방과 서재, 집안 곳곳을 비춘다. 하지만 카메라가 보여주고자 한 건,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가장 구석까지 가닿으니까. 눈물, 음울, 분노와 고통을 가차 없이 비춘다.


바닥에 발을 쿵쿵거리고 팔을 휘적거리며 천장을 향해 날카롭게 고함을 치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 소리를 피해 방 안으로, 이불속으로 숨고 표정을 찌푸리는 두 딸, 노라와 아그네스. 문은 쾅 소리를 내며 닫히고 긴 그림자가 집에 드리운다. 집은 그림자로 인해 스러져간다.


구스타프가 떠나고 두 딸이 커서 독립을 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집은 ‘가벼워’ 졌지만 카메라는 다르게 보여주는 것같다. 비어 가는 집은 사라진 사람의 자리를 되레 여실히 드러낸다. 그렇다면 카메라는 누구일까. 눈앞에서는 사라져도 여전히 그 사람의 자리가 있다고 믿는 가장 인간적인 눈. 떠나도, 죽어도, 그 사람이 내던 소음까지도 여전히 여기에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우리의 진실한 눈.



#구스타브와 노라

영화에서는 거의 구스타브가 왼쪽 노라가 오른쪽 구도에 있다.


구스타브는 오랫동안 궁금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알 수 없었다. 그가 일곱 살에 학교로 가자마자 엄마가 왜 저 끝 방에서 목을 매달았는지.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자신이 다시 돌아와서 엄마와 눈을 맞췄는데, 엄마는 그 후부터 무슨 생각으로 방으로 걸어갔을까.


어쩌면 구스타브는 알 것 같았다. 레이첼이 더 이상 영화를 할 수 없다며 돌아간 그날에, 늘 그렇듯 술에 거하게 취한 그 밤에, 그 집에서, 엄마가 죽은 그 방을 노려보면서.

끔찍했고 저주했으나 또 이렇게 돌아오고야 만 지긋지긋한 집. 그는 집을 향해 엿을 날리지도 못한다. 자신보다 거대하고 무너뜨릴 수 없는 그것 앞에 굴복한다. 어쩌면 어머니도 단지 굴복 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냥 지자, 그냥 사라지자.


노라는 오랫동안 궁금했다. 왜 이렇게 자신이 싫고 부대끼는지. 무대 위 배역으로 숨고 싶으면서도 무엇이 들킬까 봐 그토록 벌벌 떠는지, 외로우면서도 가까워지는 게 괴로운지, 왜 내 아버지는 나를 버렸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안전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던 집으로부터, 자신을 버린 아빠의 그리운 소음으로부터, 화를 내야만 감각할 수 있던 자신의 실존으로부터, 그렇게 분노에게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아빠는 내 자살 시도를 어떻게 알았을까. 어쩌면, 아빠도 그랬었던 건 아닐까. 분노라는 서슬 퍼런 칼로 스스로 할퀴기로.




#세계를 만들고 죽이기

창작자는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면서 그 세계를 구축한다. 왜? 그것을 부숴버리려고. 그는 ‘두려운 것, 모르는 것’을 만질 수 있는 물질로 만들어서 애무하고 키스하고는 종국엔 발로 차고 뭉개버리며 ‘아는 것’으로 만들어낸다. 무섭다는 건, 모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구스타브와 노라도 영화와 인물을 구축해 왔다. 사는 내내 두려웠으니까. 잘 모르는 분노로부터 삼켜질까 봐. 그러다가 정면 돌파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됐을 것이다. 분노와 슬픔을 마주하기. 상처를 뜯어내기. 그래서 거대했던 나를, 당신을 죽이기.


구스타브와 노라는 자신과 당신을 죽이는 데에 성공할까? 영화 엔딩 장면을 보면서 잠깐이지만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둘은 영화의 엔딩 장면을 찍고는 서로를 오래 바라본다. 서로에게 묻는 것 같다. 조금은 알 것 같아? 부실 수 있을 것 같아?


구스타브는 자신을 두고 죽은 엄마의 표정과 자신이 버린 자신의 딸이 죽으려 했던 표정을 얼핏 보았다.

노라는 자신의 자살시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되살려냈고, 이번엔 죽지 않았다.




#기다리는 역사


아그네스는 창작자가 아닌 역사 학자다. 역사는 시간과 거리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창작자를 필요로 한다. 창작자가 만들고 부수며 (지랄) 발광을 하는 동안 역사는 그저 묵묵히 기다린다. 마음껏 (지랄) 하렴. 덜 아파진다면 다행이다만 아니더라도 그냥 뭐든 하렴.


정말로 집인 것이다. 탄생과 죽음, 우주의 중심이 되는 포근함과 메마른 비탄. 정신없이 사는 동안도 역사는 고스란히 새긴다.


그 집의 상속자는 아그네스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분노에 휩쓸리지 않았기에 부모와 언니의 아픔을 볼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이다. “내겐 언니가 있었거든”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 말은 내가 동생에게 줄곧 들어왔으나 믿지 않았던 말이었다. 나 같은 게 너에게 좋은 언니였을 리가. 나는 노라처럼 분노에게 먹혀버려 다른 사람의 아픔과 사랑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서야 동생이 써준 그 많은 편지를 믿게 되었다. ‘언니라서 고마워, 언니가 내 언니여서 좋다’.

이제는 이 말을 믿는다. 이 말을 믿기까지 오래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