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관련 증언을 수집했던 B 프로젝트의 보조연구원
대학원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보자,는 건설적인 모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졸업학기에 들어오는 일도 가급적 내치지 않고 참여해보려고 했다. 1, 2, 3학기 내내 코로나로 학교도 못가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어디 프로젝트 한번 불려간 적 없다가 4학기에 비로소 물꼬가 트인 경우라 뭐든 새롭고 뭐든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앞서 A프로젝트와 동시에 B프로젝트에 발을 담그게 되는데...
사실 처음부터 깔끔하게 시작한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젝트인지, 내가 어떤 롤을 맡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급하게 진행된 B프로젝트 제안서에 사인부터 하고 시작했다. 내가 학교에서 경험한 프로젝트는 대부분 이런 시작이었다. 영상기록을 생산하는 프로젝트였고, 아카이브 연구라기에 또 교수님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추천을 해줘서 논문 작업에 한창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이 일은 연구가 필요한 일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프로젝트 책임자를 맡은 P는 오랫동안 혼자 작업해온 사람이라, 일을 분배하고 일을 시키는 법을 모르는 듯 했다. 업무는 공유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일을 본인이 도맡아 소화하면서 힘들어했다. 보조연구원인 나는 구술현장에 와서 검독자 역할을 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현장에서 P가 도맡아 일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이미 그가 좋은 카메라로 사진도 찍고 있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휴대폰으로 사진으로 '기록'하라는 것이다(...??)
이 역시 시작할 때 제시한 업무와는 달랐다. 그때그때 생각날 때마다 일을 시켰다. 업무가 비효율적이었다. 불시에 P가 정하는 장소, 시간으로 가서 반나절 가만히 지켜보는 게 내 일이었다. 이런 역할이 왜 필요한지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은 그렇게 시작됐고, 마찬가지로 함께 일하는 교수님은 ‘팀이니까 함께’라는 마음으로 현장에 나가달라고 했다. 단기 용역일 뿐인데 팀이라니 함께라니,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내가 얻은 것은 세 달 간의 급여 밖에 없었다. 어떤 공부도 연구도 되지 않았고, 냉정하게 말해 시간만 맞바꾸어 썼다. 급기야 끝날 즈음 P가 이 모든 프로젝트를 자기 혼자 했으니 보조연구원 급여를 뱉어내라는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해대서 곱게 끝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이 프로젝트를 회고해보니 여러 가지 배운 점이 있어 기록해둔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리고 30여년간 혼자 일하고 성취해온 P를 겪으면서 향후 업무에 관한 몇 가지 원칙을 세울 수 있었다. 어떤 사람하고 일하지 말아야 할까. 우선 협업도 해본 놈이 하는 거다. 혼자 일하던 사람은 사람을 부릴 줄도, 시킬 줄도 모른다. 일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의 치명적인 단점은 상대방을 동료로 보는 마인드가 없다는 것이다. 나 역시 오래 프리랜서 생활을 해서 혼자 일하는 데에 익숙하지만, P를 보면서 저렇게 독야청정 혼자만 완고하게 나이 들면 안되겠구나 싶었다.
일하기 전에 계약서를 반드시 작성하는 것이야 일의 기본이지만, 아주 작은 프로젝트라도 향후에는 롤을 반드시 명시하고 들어가기로 다짐했다. 이것저것 할 줄 안다고, 이것저것 할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이것은 나의 업무량과 업무의 목적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것도 없이 유야무야 일을 시작하면, 이번처럼 보람도 없을뿐더러, 일 끝나고 ‘일을 많이 했네, 안했네’하는 무의미한 논쟁의 불씨가 된다. 롤을 명확하게 한다는 것은, 이 일의 비전을 공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P가 계속 운운했던 얘기는 ‘이 작업이 대단히 의미있고 가치있는 역사적 과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본인 생각일 뿐. 그 대단한 비전이 공유되지 않는 한, 서로 '동료'가 되지 않는 한, 그 어떤 대단한 과업도 단순 알바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자기한테만 중요한 가치를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하고는 일하지 말자. 그런 설득의 기술도 없고 설득하는 노력도 없다면 그 사람은 동료를 가질 자격이 없다. 일할 때 각자 명확한 롤을 주고, 비전을 공유하는 것, 이것은 최소한의 존중의 문제다. 나 역시 함께 일할 때 명심해야 할 지점이다.
줬다 뺐는 놈하고는 상종하지 말 것. 수년간의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급여를 적게 주는 놈, 늦게 주는 놈은 봤어도 줬다 뺐는 놈은 처음이었다. 대학원생 프로젝트가 원래 그렇다고? 애초에 시작할 때부터 합의된 내용도 아니고, 일 다하고 나니 준 돈 내놓으라는 이런 갑질은 또 처음이다. 프리랜서로 일하면 좋은 사람, 악덕한 사람을 케바케로 경험하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이런 악덕한 사람을 만났을 때 바로 손절할 수 있다는 있다는 게 또 프리랜서의 장점이다.
나는 부르는 현장에 참석했고, 애초에 내 일이 아님에도 편집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기타 업무까지 수행한 것에 비하면 월급을 뱉어내긴 커녕 더 받아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번 작업까지는 잘 마무리하되, 이후에 우리가 함께 일할 일은 없을 거라고, 난 으른이니까 언성 높이지 않고 조근조근 말하고 돌아왔다. (아마 상담선생님이 이 얘길 들으면 ‘일 주는 사람 손절해봤자 누구 손해겠어요?’하시겠지만 내가 평생 을인가. 손절하면 갑도 을도 아니지.) 이 관계에서 나는 이 정도 배움이면 충분하다.
원래 그런거야. 대학원생 따위. 보조연구원따위. 원래 사소한 일 시키는 거라고. 쓸데없는 일 하는 게 일이라고. 가끔은 급여도 반환하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원래 그렇다는 것이 나도 그래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사소한 일 시키면, 사소한 마음으로 사소한 돈 받고 가볍게 일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최소한 '팀'을 운운하려면, 그렇게 떠들어대던 이 일의 대단한 '가치'를 공유하고 만들어가기 원한다면, 설사 작은 일을 시키더라도 일 시키는 사람은 '원래 그렇듯이' 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약속한 대로 일하고, 약속한 대로 받고. 나는 '원래' 이렇게 일하니까.
뻔하고 단순한 얘기 같지만, 한번 데이고 나니 기준이 분명해졌다. 이 다음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나는 전보다 명확하고 분명하게 커뮤니케이션했다. 봐라. 개똥도 쓸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