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던 A사 데이터 연구 프로젝트 보조연구원
폭풍같이 몰아치고 지나갔던 2021년 하반기. 졸업학기니 당연히 논문에 집중한 시간들을 보내게 될 줄 알았는데, 프로젝트 세 개에 발 담그고 달리게 되었다. 논문 분야와 구체적인 주제를 잡고 나니 오히려 만나야 할 사람들이 생기고, 알음알음 일도 생기는 그런 식이었다. 나는 방송영상, 보도영상 기록관리를 중심으로 공부한 덕분에 7월에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보조연구원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몇몇 언론사 소속으로 일했기 때문에, 어떤 보도정보시스템을 쓰는지 영상 아카이브나 당일 영상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대략적으로는 알고는 있다. 그런데 이번에 제안받은 A사는 우선 처음 일해보는 기관인데다가 영상 아카이브 규모도 꽤 큰 편이라 무조건 해보겠다고 했다. 여기도 처음에는 구체적으로 업무가 어떻게 되는지, 롤이 어떻게 되는지도 불명확했다. 계약도 불분명한 채 급하다고 일단 회의하고 일은 시작했는데, 처음에 교수님에게 제안받은 근로조건과 너무 달랐다.
5개월이나 진행되는 일이었으므로, 한 달은 서로 적응 기간이라고 생각해서 굴러가는 대로 갔다. 주 2~3회 자율 출근이라고 했지만, 주5일 9 to 6 근무였고, 연구가 아니라 자잘한 편집업무였다. 급기야 한달후 급여마저도 애초에 제안서에 나온 것과 크게 차이가 나서(계약서는 한달 한참 후에나 썼다) 더 이상 계속 굴러갈 순 없었다. 일단 교수님께 그리고 담당자에게 프로젝트에 계속 참여할 수 없는 이유를 말씀드리고 중단 의사를 밝혔다. 아무리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해도, 일을 중단하는 과정은 고민이 따르고 스트레스도 받고 불편하기 마련이다. 또 교수님 소개로 시작한 일이라 이렇게 중단해도 되나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통보는 했고, 업무 종료 처리되는 동안 잘 마무리해야지, 하고 출근했는데 담당자가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나에게 더 나은 일거리를 제안해주었다. 프로젝트와 별개로 내 전문성을 살려, 내가 할 수 있는 분석 업무를 요청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매일 출근이 어렵기 때문에 간곡하게 제안도 거절했는데, 그렇다면 주 1회 정도 출근하여 미팅하고, 나머지는 재택근무로 전환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A프로젝트는 그렇게 일주일에 한번 출근해서 한 주간 일할 자료를 취합하고 집에서 리포트 작업을 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진작에 말할 걸.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고 싶다면, 혹은 개선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바로 얘기할 걸. 고민이 많아서 이런 얘기를 꺼내면, 중단하겠다는 의사에만 집중해서 서로 불편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불편함을 맞닥뜨리기를 미루고 미룬 셈이다. 하지만 일면식 없는 상사여도 이 사람 역시 이 프로젝트에서 좋은 결과를 얻고 싶어 한다는 것, 이 사람도 더 나은 퍼포먼스를 위해서 뭔가 바꿔보고 싶지만, 어쩌면 나처럼 미뤄온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결국은 적절한 타이밍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이번은 운이 좋은 케이스라는 것도 안다. 내가 중단을 통보했을 때, 조용히 처리되어 프로젝트에서 빠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에 최소한의 신뢰가 생겼을 때는, 상대방이 무조건 불편한 말에 불쾌하게 반응할 거라고 상상하기 보다는 어떤 상상이나 불안 없이 나의 결단으로 마주치는 것이 낫다는 것을 배웠다. 또 내가 그렇듯 다른 사람들도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하고, 의외로 나를 돕고자 하는 마음도 있다는 것도 이번 일을 통해서도 배웠다.
나는 늘 내 경력과 전공 공부가 동떨어져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일터인 방송국에서 기록 관리를 하고 있자니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개중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보도영상이니까. 5개월 동안 분석과 리포트 업무를 즐겁게 해냈다.
내가 처음부터 이 상사에게 아주 작은 신뢰를 얻었다면, 그건 내 경력 덕분일 것이다. 계속 이 분야에서 프리랜서 활동을 해왔으니까 프로젝트 이상의 업무를 제안한 것일테다. 나는 계속 ‘탐색, 방황’이라고 생각했던 내 여정이 누군가에게는 좋은 경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경험은 어떻게든 쓸모가 있다. 그러니까 어려운 순간이 닥쳤을 때, 최후에는 과거의 나, 미래의 내가 소환돼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있다! 걱정 말자. 걱정 마. (당시에는 걱정이 많았으므로...) 나는 여전히 부족한 것도 많지만,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하는게 정신건강에도 업무에도 얼마나 좋은 영향을 미치는지 깨달았다.
매주 회의를 하면서 칭찬도 격려도 많이 받고, 내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분야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내가 어떤 강점을 가졌는지 알게 된 것이 이 일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나는 이때 진행한 리포트 작업을 기반으로 논문에 필요한 데이터 일부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데이터 뿐만 아니라 A사 내부나 시스템에 아주 많은 부조리함과 문제점을 알게 되기도 했지만, 나는야 프리랜서고. 보조연구원일 뿐이고.
굳이 그런 것까지 기록할 필요가 없지만, 이것 하나만 기억해 둬야지. 서로 신뢰하는 것, 서로 평가하는 행위는 어떤 특정 순간, 특정 사건에서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 곳곳에서, 서로 습관을 파악하는 순간을 통해 불시적으로 누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러니까 결국 태도가 중요하다. 나도 일터에서 맞닥드리는 건 그 사람의 나이도, 연차도, 경력도, 취향도 아니고 오직 그 사람의 태도니까. 알고 있었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하면서도 많이 느꼈다.
재택근무 덕분에 일도 논문 작업도 수월하게 할 수 있었지만, 대신 출퇴근 하는 동료들이 얻는 것까지는 얻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상사나 동료와 매일 매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 일하는 중간중간의 이벤트를 즐기는 것. 나는 정말 깔끔하게 일만 하고 5개월을 보냈네^.^ 일 종료하는 날 단톡방엔 서로 애틋하고 애절한 문자가 계속 올라왔지만, 나로서는 정든 것도 맘 상한 일도 없어서 미련 없이 깔끔하게 일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