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지도 않을 가방을 갖고 싶게 만드는 심정
"남편, 이거 봐."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리던 그것을 꺼내 식탁 위에 탁 놓았다.
"응? 코로나 키트야?"
"아이 진짜. 임테기잖아. 두줄 보여?"
그렇다. 난 임신을 했다. 왠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싶었다. 임신은 딱히 계획에도 없었으면서.
"???"
눈물을 흘리며 기뻐할 줄 알았던 남편은, 거짓말 치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아니, 임테기 1줄을 2줄로 만드는 거짓말은 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야? 아무리 진짜라고 말해도 남편은 얼빠진 얼굴로 거짓말이잖아...거짓말이잖아…만 반복했다. (아기 갖기 싫었나?)
그동안 내심 자연임신이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산부인과에서 검사했을 때 난소 나이가 20살(20대 아니고 20살!)로 나와서 자신 있었으나, 40대가 넘은 남편의 능력은 또 어떨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아기가 찾아온 것이다. 결혼 8개월 차였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무시무시한 임신 괴담과는 달리, 나는 역류성 식도염 정도만 쎄게 앓으며 출산 예정일까지 순탄히 왔다. 그런데 예정일을 딱 하루 남긴 날 아침, 태동이 조금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볍게 체크하려고 산부인과를 찾았다.
"대부분은 괜찮지만, 막주 되어서 아기가 잘못되는 경우가 있어서요. 오늘 출산합시다. 유도분만으로 출산할 거예요."
"네? 아.. 네. 배고픈데 점심 먹고 와도 되나요?"
"안 돼요. 당장 입원 수속해서 주사 맞고 하면 오늘 출산도 빠듯해요."
"아 네. 그럼 네..."
배가 고픈데 어떻게 힘줘서 애를 낳아요? 이 말은 못 하고 입원수속을 마쳤다. 가족분만실로 바로 가나 했더니, 공동 병실에서 유도제를 맞다가 아기가 나올 준비가 될 즈음에나 옮긴다고 했다. 침대 옆 가려진 커튼 너머에서 다른 산모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TV에서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들으니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별 타격이 없었다. 난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편, 난 출산 쉽게 할 거 같애. 옛날부터 친구들이 나더러 골반 커서 애기 잘 낳겠다고 했거든. 그리고 나 아픈 것도 되게 잘 참아. 저번에 치과에서 마취 안 하고 치료했는데, 의사가 나더러 진짜 잘 참는다고 깜짝 놀랐다? 난 진통 와도 소리 안 지를 거야."
나는 살면서 뭐든 잘하고 싶었고, 애 낳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애 잘 낳는 게 뭔지는 모르지만, 짧게 진통하고 배에 힘 빡 줘서 짠 하고 낳아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다.
오전 11시 반. 입원 수속을 마치고 유도분만 주사제를 꽂았다. 처음엔 별로 느낌이 없었다. 언제쯤 진통이 오려나? 남편은 내 손을 잡고 앉아서 간간이 핸드폰을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갑상선 질환이 있어서 밥을 제때 챙겨 먹어야 하는 그이기에, 일단 나가서 밥을 먹고 오라고 했다. 주저할 줄 알았던 그가 벌떡 일어나서 밥을 먹으러 나갔다.
나는 홀로 누워서 '대체 진통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하며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배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거구나.'
초반에는 심한 생리통 정도의 진통이 드문드문 느껴졌다. 그러다 점점 통증이 심해져서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물었다.
"산모님, 진통 왔어요?"
"네... 아파요."
"잠시만요."
곧 내 담당의가 들어왔다. 거의 10개월을 주기적으로 본 익숙한 얼굴이었다. 늘 웃는 얼굴에 상냥한 우리 의사 선생님.
"많이 아파요?"
"아... 견딜만해요."
"이건 좀 아플 텐데, 참아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더니, 손을 내 질로 쑥 집어넣더니 사정없이 쑤셔댔다.
"으악! 뭐예요!! 뭐 하는 거예요!!"
"어허! 참아요! 애기 안 낳을 거예요?"
손을 집어넣어 양수를 터뜨린 거였다. 생각보다 아프기도 했지만, 처음 들어보는 험악한 목소리에 더욱 놀랐다. 그렇게 조곤조곤 상냥하던 의사쌤이 왜 저러지? 그러나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이기엔 통증이 너무 심했다.
"으윽..."
남편에게 카톡을 했다.
- 남편 왜 아직도 안 와. 나 아파 죽겠으니까 빨리 와!
출산 진통은 참 희한했다. 주기적으로 진통이 오는데, 왔을 땐 엄청 아프고 안 올 땐 아무렇지도 않았다. 진통 주기가 점점 짧아져야 자궁문이 열리고 아기가 나올 텐데...
남편이 헐레벌떡 커튼을 열고 들어왔다.
"류미야, 괜찮아? 진통 왔어?"
"응... 왔는데 지금은 괜찮아. 아마 곧 또 올 거야."
"자, 이거."
남편이 내게 하늘색의 작은 상자를 건넸다. 열어보니 진주(물론 가짜)로 된 묵주 팔찌였다. 로즈골드 색 십자가에 큐빅이 박혀 있어 고급스럽고 예뻤다. 동봉된 카드에는 감동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제부터 세 식구로 행복하게 살아가자는.
"고마워... 너무 예뻐."
정신없는 와중에도 선물 사올 생각을 하다니... 그의 예쁜 마음에 크게 감동했다. 팔찌를 손목에 차고 두 손을 모으니 가슴이 충만해지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진통의 주기가 짧아졌다. 그리고 그 강도가 처음에 비해 몇십 배는 강해졌다. 처음엔 생리통 심한 날의 통증 정도였는데, 점차 강도가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으으으윽... 으아아아악!! 너무 아파... 배가 너무 아파... 아 진짜 아파. 진심으로 아파. 아아아아!!! 아 진짜 아프다고!!! 남편 어떻게 좀 해봐. 아아아!!! 아퍼아퍼!"
유도제가 투여되면서 진통은 점점 더 심해졌지만, 자궁문은 몇 시간째 열리지 않고 그대로였다. 무통주사는 자궁문이 일정 부분 이상 열려야 놓을 수 있다고 했다. 진통은 점점 심해지는데 대체 자궁문은 언제 열리는지... 자궁문이 안 열리면 아무리 진통을 해도 무소용이었다. 언제까지 진통을 겪어야 하는지 기약이 없으니 끔찍했다. 함께 고통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릴 줄 알았던 남편은 한 마디도 안 하고 손만 붙잡고 앉아 있었다.
진통이 잠시 멎었을 때 물었다.
"나 아픈데 걱정 안 돼? 왜 말없이 앉아 있어?"
"아니... 류미가 진통 올 때마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오디오가 안 비는데 내가 어느 부분에서 말을 해."
"아니 내가 무슨... 아아...아아아!! 아 또 왔어! 아 진통 왔다고! 아 진짜 아프다고! 아 어떻게 좀 해봐 좀! 아 나 아프다고 아 진짜 아파 엄청! 엄청엄청 아파!! 으악 아프다고!!!! 아아아!!!"
그러게. 난 TV에 나오는 얌전히 끙끙대는 산모들과 달리 온갖 말을 방언처럼 내지르고 있었다. 근데 어떡해. 진짜 아픈데.
5시간째 진통을 하고 있을 무렵, 담당의가 나를 보러 왔다.
"선생님, 저 너무 아파요. 엉엉..."
"원래 아파요. 산모님은 속골반이 많이 좁아서 출산이 더 힘들 수도 있겠어요."
나더러 골반 크다고 애 잘 낳을 거 같다고 했던 애들 누구냐. 겉골반만 번지르르하고 속골반은 허당이었네.
"흐음... 근데 자궁문이 안 열리네. 아까랑 똑같아요. 조금이라도 열려야 무통주사를 맞고 진행할 텐데."
"그럼 어떡해요?"
"이제 퇴근 시간이니까, 주사제 멈추고 내일 또 시도해야죠."
"아까 양수 터뜨리셨잖아요. 자궁에 양수가 없는데 아기는 어떡해요?"
"하루 정돈 괜찮아요."
우리 아기가 양수도 못 마시고 내일까지 괜찮으려나... 하는 생각보다는, 고통을 오늘로 끝내버리고 싶었다. 하룻밤을 여기서 자고 내일 이걸 또 한다고? 난 못한다.
"선생니임... 엉엉... 저 그냥 수술할래요. 수술해주세요..."
정기검진 갈 때마다 '저는 자연분만 할게요'라고 자신했던 나지만, 남들보다 고통을 잘 참는다고 남편한테 센척했던 나지만, 결국 엉엉 울면서 제왕절개 해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녀가 잠시 침묵을 지키는 동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눈을 감았지만 훤히 보이는 듯했다.
"...수술 준비할게요."
수술 동의서 등등을 남편이 처리하고 나는 신속하게 수술실로 옮겨졌다. 유도분만 주사제를 제거하니 마법처럼 진통이 사라졌다. 나는 아직 아기 낳을 준비가 안 되어 있던 걸까? 수술대 위에 날 눕혀놓고 마취 주사를 준비하면서, 담당의와 마취과 의사가 잡담을 나누었다.
"에휴... 오늘 이렇게 늦어질 줄 알았나요."
"그러게요. 오늘 맥주 약속 있었는데 미뤘네. 왜 하필 오늘이야."
"어머, 맥주 약속은 미루면 안 되는데. 호호호. 빨리 끝내시죠."
"그래요 후딱 해치우고 가야지."
기분이 묘했다. 나 아직 마취 안 해서 정신 있는데요. 후딱 해치워야 하는 몸뚱이라 미안합니다. 마치 내가 아무것도 못 듣는 물체인 양 대하는 태도가 기분 나빴다. 환자가 수술대 위에서 얼마나 긴장할지 생각도 안 하고 말야. 그래도 칼 든 의느님들에게 대놓고 불만을 표할 용기는 없었다.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부분 마취만 하고, 아기 얼굴을 보여준 후에는 수면 마취를 한다고 했다. 허리 쪽에 주사제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반신에 감각이 없어졌다. 다리를 들어 보았지만,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배 쪽으로 뭔가가 지나가는 느낌이 든 것도 같았다. 그 후 1분도 되지 않아 간호사가 외쳤다.
"아기 나왔습니다!"
"흐애애앵 흐에에...흐에에엥!"
이렇게 간단할 일이야? 근데... 원래 아기 울음소리는 우렁차지 않나? 우리 아기는 힘없이 우는 소리를 냈다. 간호사가 내 얼굴 옆으로 아기를 데려왔다.
"산모님, 보세요. 아기 손가락 발가락 10개씩 다 있어요. 아기 보니까 어때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하나였다.
"귀여워요. 너무 귀여워요. 너무... 귀여워요..."
얼굴은 제대로 안 보였지만, 자그마한 몸집이 너무 귀여웠다. 내가 아기를 낳았다니... 꿈일까.
"자 이제 수면마취 들어갑니다."
간호사가 팔에 주사를 놓았다. 다 끝났구나. 녹초가 된 나는 눈을 감았다. 잠에 빠져들기 직전, 이런 생각이 스쳤다.
'묵주 팔찌는 택도 없어. 샤넬 백 정도는 받아야 돼.'
여자들의 출산 선물 리스트에 왜 명품 백이 있는지 깊이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글은 매주 월요일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