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21)
드디어 우리의 첫 드라이브 날이 왔다. 경기도민인 그는 친히 우리 동네까지 오셨다. 중간에 픽업하려면 번거로울 것 같다면서. 이토록 사려 깊은 제비꽃을 조수석에 앉히고 출발했다.
"갑니다. 출발~"
신이 나서 액셀을 밟았다. 엄마의 아반떼는 운전연수 강사 차보다 승차감이 훨씬 좋았다. 연수 끝나고도 차를 몇 번 몰고 다니며 운전에 자신감이 생겼다. 강화도까지 1시간 반이니 거리도 딱 좋고, 옆에서 제비꽃이 든든하게 보좌해줄 테니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제비꽃이 좀 불안해 보였다. 겁이 많은 스타일인가? 안전벨트도 튼튼하고 에어백도 빵빵하게 나올 텐데 뭐가 걱정인지 모르겠네. 제비꽃은 출발 전부터 말이 별로 없더니, 마포구청쯤 와서부터는 한 마디도 안 했다. 이런 침묵을 나는 정말 싫어한다.
"아 맞다, 음악을 안 틀었네."
마침 신호에 걸렸다. 카카오 내비를 틀어놓은 핸드폰을 거치대에서 꺼내려는 순간, 제비꽃이 번개같이 내 손을 잡았다.
"위험하니까 이따가 해요."
"네? 음악 없으면 안 되는데. 운전할 때 기름이 필요한 것처럼 음악은 필수예요."
"그럼 제 핸드폰으로 틀게요. 류미 씨는 운전에 집중해요."
이 분 오늘 왜 이렇게 예민하지? 어련히 알아서 운전할까. 돈 내고 연수까지 받았는데 너무 불안해하시네.
제비꽃은 음악을 핸드폰으로 틀었다. 차에 블루투스로 연결하지 않고 핸드폰으로 생으로 틀었다는 말이다. 아니, 아무리 차가 없어도 그렇지 차에선 카 오디오로 음악을 들어야 하는 걸 모르시나? 감성이 너무 안 통하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불안하다는데 입 다물고 운전하는 수밖에. 첫 나들이라 기대를 많이 한 만큼 기분이 확 저조해졌다.
김포를 지나니 차가 많이 빠졌다. 길이 뚫리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룸미러를 보니 뒤에 BMW가 따라오고 있었다. 불안하게 왜 외제차가 바짝 따라와. 속도를 좀 올려야 하나?
룸미러에서 시선을 거두고 앞을 보니 차가 약간 중앙선 쪽을 향하고 있었다. 핸들을 아주아주 살짝쿵 획 꺾어 일직선으로 만들었다. 갑자기 제비꽃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왜 왜요!"
제비꽃은 천장에 있는 손잡이를 꽉 잡았다.
"류미 씨, 핸들을 그렇게 급하게 꺾으면 어떡해요!"
"아.. 아니 뭐가 핸들을 급하게 꺾어요. 약간 사선으로 가는 것 같아서 오른쪽으로 살짝만 돌린 건데."
"핸들을 그렇게 확 꺾으면 안 돼요."
"확 꺾지 않았다니까요?"
제비꽃은 말이 없었다. 아니... 이게 확 꺾은 거라고? 방향 맞추려고 아주 약간, 한 15도? 정도 오른쪽으로 돌린 건데 뭐가 확 꺾은 거야. 작은 일에 이렇게 소란을 떠니 슬슬 짜증이 났다.
그는 이후 말이 없었다. 아무리 놀라도 그렇지 - 놀랄 일도 전혀 아니었지만 - 그렇게 입을 꾹 다물면 어떡해? 이 분위기 어쩔 건데. 우리의 첫 드라이브를 망칠 셈이야? 내가 누구 때문에 운전연수까지 받았는데! 구직하느라 바쁘고 돈도 없는데! 내가 누구 때문에 한 거냐구! 나도 화가 나서 속으로 궁시렁댔다.
어느새 핸드폰 음악마저 꺼졌다. 제비꽃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에잇 짜증나. 속도를 높였다. 그냥 빨리 도착하자.
- 띠링띠링! 제한속도 60km 도로입니다.
현재 속도를 보니 72km였다. 좀 줄여야겠네.
- 띠링띠링! 제한속도 60km 도로입니다.
아 알아 알아, 줄일 거야. 나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 띠링띠링!
60km까지 다 줄인 것 같아서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과속 카메라를 통과했다.
-띵동!
"류미 씨… 지금 속도위반했어요."
"네?"
"60km 도로에서 61km로 통과했다구요."
할 말을 잃었다. 60이나 61이나... 물론 60km 도로에서는 그 이하로 달리는 게 맞지만, 사람이 어떻게 매번 딱 맞춰 다니냐고. 그리고 보통 속도위반은 규정 속도의 10%를 초과했을 때 딱지가 날아온다고 알고 있었다. 61km면 10%에도 한참 못 미치는구만. 뭐가 이렇게 빡빡해? 나는 폭발 직전이었다.
그러나 참았다. 말을 말아야지. 오늘을 얼마나 기대했는데, 이렇게 망칠 수 없었다. 일단 도착하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운전에만 집중하자.
침묵의 아반떼는 초지대교를 건너 목적지인 토크라피에 도착했다. '강화 카페'라고 치면 블로그 글이 쫙 나올 정도로 핫한 카페였다. 그리스 산토리니에 있을 법한 모양의 아담한 건물들 - 그리스에 안 가봐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 이 있고, 잔디밭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기 생각보다 더 좋은데요?"
나는 속으로 침묵 선언을 한 것을 까먹고 먼저 말을 걸었다. 아차차. 하지만 뭐, 운전도 끝났겠다 기분 좋게 놀아야지. 다들 행복한 얼굴로 일요일 오후를 즐기고 있는데, 우리만 인상을 쓰고 있는 건 싫었다.
"저 건물이 메인인가 봐요. 가서 커피 시켜요."
메인 건물에 들어가니 커피 향이 진하게 풍기고, 먹음직스러운 빵이 진열되어 있었다. 행복의 나라에 도착했구나. 이런 예쁜 공간에서 맛있는 커피랑 빵을 먹으면 전쟁도 멈출 수 있겠네. 우리의 감정 싸움도 여기서 멈출지어다.
따뜻한 카페라떼와 따뜻한 아메리카노, 그리고 스콘과 크루아상을 시켰다. 내부엔 빈자리가 없었다. 우리는 한참 돌아다니다 겨우 한 자리가 비어 앉을 수 있었다. 어느새 주문한 커피와 빵이 나왔다. 나는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스콘의 한쪽 모서리를 포크로 잘라 입에 넣었다. 제비꽃의 입에도 한 조각 넣어줬다.
"커피도 스콘도 맛있네요. 분위기도 좋구. 역시 류미 씨가 취향이 좋아서 이런 곳 잘 찾는 것 같아요.
다시 인자한 제비꽃으로 돌아와 있었다.
"뭘요. 이왕 나왔는데 맛있는 거 먹으면 좋잖아요."
기분이 최상으로 회복되었다. 역시 오길 잘했어. 이게 얼마만의 교외 나들이야. 제비꽃이랑 오니 더더더 좋았다. 손을 뻗어 제비꽃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서는 다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 크루아상 맛있네요. 예전에 파리 여행 갔을 때 많이 사 먹었는데."
"어머, 파리에도 갔었어요?"
카톡 프로필에서 본 거기가 프랑스구나.
"네 성당에서 단체로 여행 갔었어요. 되게 좋았는데, 여러 명이서 택시 타고 다니느라 많이 못 돌아봐서 아쉬웠어요."
"그래요? 인원이 많으면 지하철 타면 되잖아요."
"파리에서는 지하철 타는 거 아니에요."
"왜요?"
"위험해요."
"큭? 뭐가 위험해요. 내 친구들은 파리 여행 가서 다 지하철 타고 돌아다니던데."
"그거 위험한 짓이에요. 파리에서 지하철 타면 안 된다니까요."
"다들 여행 가서 지하철 타고 다니다 멀쩡히 돌아왔는데 뭐가 위험해요. 우리 엄마도 이모들이랑 가서 지하철 타고 다녔구만."
난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난 뉴욕 여행할 때 밤 열두 시에 혼자 지하철 타고 그랬어요. 조심하기만 하면 별로 안 위험해요. 다 사람 사는 곳인데 뭐가 무서워요. 으슥한 골목도 아니고 지하철이."
"..."
제비꽃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뭐지? 설마 삐진 건 아닐 테고?
"에~ 제비꽃 겁 많구나. 지하철 타는 게 무서우면 세상에 뭐가 안 무서워요. 다 큰 아저씨가 진짜 겁 많네. 겁쟁이네 겁쟁이~ 겁쟁이!"
"그만해."
응? 내가 잘못 들었나?
"지금 뭐라 그랬어요?"
"그만 하라구요."
제비꽃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뭐야, 겁 많은 걸 겁 많다고 한 게 잘못이야? 이런 걸로 삐지는 쪼잔한 사람이었어?
"지금 나더러 그만하라고 한 거예요?"
"네."
네? 참내, 감히 나한테 그만하라고 해? 그리고… 이게 화낼 일이야? 무슨 남미 국가도 아니고 프랑스에서 지하철을 무서워서 못 탄다는 게 말이 돼? 그리고 겁쟁이는 자기면서 왜 나한테 신경질을 내? 원래 이렇게 겁 많고 까칠하고 속 좁은 사람이었어?
"제비꽃, 오늘 왜 이래요?"
"..."
대답 안 하는 것도 너무 짜증났다. 나도 화가 나서 고개를 돌리고 가만히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못한 게 없다. 속 좁은 그에게 화가 났다. 나도 핸드폰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화 풀어줄 때까지 한 마디도 안 할 거야.
그러나 20분이 지나도 그는 말이 없었다. 내가 속이 터져서 죽을 것 같았다.
"오늘 차에서부터 왜 그래요? 뭐 안 좋은 일 있었어요?"
"류미 씨..."
"말해봐요."
"나는 안전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에요. 물론 파리 지하철이 안 위험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검색을 해봤는데 파리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당한 얘기를 많이 봐서 안 탄 거예요. 그런데 류미 씨가 계속 겁쟁이라고 놀리니까 기분이 나빴어요."
아니... 겁이 적당히 많아야 이해하고 넘어가지, 지하철을 못 탈 정도로 겁이 많은 건 도무지 용납이 안 된단 말입니다, 네? 물론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리고 아까 차에서는요... 류미 씨가 초보인데도 핸들을 한 손으로 잡고 음악 틀려고 하고, 핸들을 확 꺾으니까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내가 핸들을 확 꺾지 않았다니까요!"
"뭘 핸들을 확 안 꺾어요. 이렇게 이렇게 확! 확! 꺾었잖아요."
제비꽃은 핸들을 잡는 시늉을 하면서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고 오른쪽으로 반원을 그렸다. 저게... 내가 핸들을 꺾은 각도라고? 오른쪽 왼쪽 각각 180도, 합쳐서 360도가?
"아니! 그렇게 꺾었으면 차가 직각으로 가서 도로를 이탈했어야지! 그래 봐야 약간 튼 것뿐인데 무슨 그렇게 오바를 해요!"
난 폭발했다.
"그리고 겁이 많아서 겁쟁이라고 한 게 뭐가 잘못이에요! 남들 다 지하철 타고 다니는데 혼자만 안 타면 겁쟁이 맞지! 그리고 핸들도 그렇게 꺾지도 않았는데 오바하고! 운전하는데 옆에서 불안해하면 운전자는 더 불안한 법이에요! 알아요? 속도 61km로 통과했다고 타박하는 것도 내가 어이가 없어서 어? 그러고선 차에서 한 마디도 안 하고 불안한 분위기 조성한 건 잘한 거예요?"
성질이 나서 할 말 다 쏟아냈다. 제비꽃은 잠자코 듣더니 이후 한 마디도 안 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느새 30분이 흘렀다. 허... 30분을 말 한마디 안 하네. 독하다 독해.
꽉 찼던 자리는 이제 절반 정도 비어 있었다. 다들 저녁 먹으러 갔나 보네. 이게 뭐야, 소중한 주말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물론 회사를 안 가니 내일도 똑같은 하루겠지만) 우리의 첫 나들이가 이렇게 끝나다니 너무 속상했다.
마침내 제비꽃이 입을 열었다.
"류미 씨, 내가 겁이 많은 건 사실이에요. 차 탈 때도 항상 조심히 운전하는 사람 차만 타려고 해요. 그래서 살면서 위험한 일을 잘 피해 다닌 것 같아요. 안 좋은 일은 한순간에 벌어지니까, 미리 조심하는 게 좋아요 난."
나는 이것저것 다 하고 살았는데도 위험한 일 피해 가며 살았는데? 나랑 너무 안 통하네. 물론 입안에서만 말했다.
"아까 류미 씨한테 화낸 건, 난 류미 씨한테 멋있게 보이고 싶은 사람인데 자꾸 겁쟁이라고 놀리니까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그런 거예요. 화 풀어요. 미안해요."
"..."
대답은 안 했지만, 제비꽃이 미안하다고 하는 순간 화가 다 풀렸다. 나는 왜 이렇게 쉽게 무장해제당하는가?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슬프고 쓸쓸한 눈이 보였다. 그래, 다 이 눈 때문이야. 이런 쓸쓸한 눈빛을 보면 화를 낼 수가 없어진다.
그래 그만하자. 핸들 꺾기든, 61km든, 파리 지하철이든 무슨 상관이야. 남자친구가 저렇게 쳐다보는데. 나는 말없이 제비꽃의 손등을 꼭 잡았다. 제비꽃이 다른 손을 들어 내 손등에 놓았다. 나는 다른 손을 들어 제비꽃의 손등에 놓았다.
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둘이 지랄도 풍년이네’라고 했을 것이다. 그치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렇게 화해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해줘야지.
이 날의 강화도 전투는 앞으로 우리 앞에 있을 수많은 전투의 시발점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