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22)
"라~스트 크리스마스 아 게뷰마핱"
아침부터 흥얼흥얼 노래가 나왔다. 컴퓨터 화면에 띄워놓은 이력서에 마우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왜 꼭두새벽에 일어나 이력서를 쓰고 있느냐. 이따 제비꽃이랑 놀려면 다 해놔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겨울은 싫지만 크리스마스는 좋아한다. 반짝반짝 전구가 달린 크리스마스트리도 좋고, 한 해가 끝나는 아쉬움을 잊게 만드는 떠들썩한 분위기도 좋다. 무엇보다 올해는 남친과 함께라는 사실.
크리스마스 이브인 어제는 안 만났다. 제비꽃이 이브가 아닌 당일에 만나자고 해서다. 역시 좀 의심스러웠다. 이브에 다른 여자 만나고 당일에 날 만나는 건 아닐까? 연인들의 데이트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국룰이니까. 근데 잠깐, 연인들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나면 크리스마스 당일엔 뭐 하지? 안 만나나?
"보통은 이브에 만나서 크리스마스 당일까지 쭈욱 같이 있지. 모쏠이세요?"
그렇구나. 역시 나의 연애 대모 Y님은 모르는 게 없어.
이브 날, 나는 이런 의심을 숨기고 퇴근 시간에 제비꽃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직접 확인하는 게 좋으니까. 핸드폰 화면에서 그는 뽀얀 입김을 내쉬며 집에 가는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시간은 저녁 8시.
"제비꽃,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왜 만나자고 안 했어요?"
"네? 회사 가야죠. 평일이잖아요."
심플한 대답이었다. 이브라고 휴가 낼 생각이 없었구나. 연애를 오래 쉬어서인지 크리스마스 이브가 연인들의 날이라는 걸 모르는 듯했다. 우리도 남들처럼 이브에 만나서 다음날 헤어지면 얼마나 좋아. (참고로 크리스마스 이브는 연인들의 날이 아니라 예수님 탄생 전 날이다. 다 아는 사실이라고?)
12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9시도 안 돼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빨리 나가고 싶다.'
다 채우지 못한 이력서를 꺼버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얼굴에 수분팩을 붙였다. 밖은 춥고 건조하니까 얼굴을 촉촉하게 만들어야 예뻐 보이지. 팩을 붙인 채로 머리를 말렸다.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싹 넘기고 맨 아래 머리부터 층층이 롤빗으로 감으며 말렸다. 이쁜 웨이브를 만들어야지.
머리를 다 말리고 화장을 시작했다. 가진 화장품을 몽땅 꺼냈다. 독도 스킨 토너, 피지오겔 크림, 이니스프리 선크림, 랑콤 뗑 미라클 파운데이션, 맥 소바 아이섀도, 클리오 눈썹연필, 디오르 립글로우. 다 동원해서 화장을 정성껏 했다. 10분 만에 다 끝났다.
"아 왜 이렇게 화장품이 없어!"
더 치장하고 싶어도 이게 한계였다. 시계를 보니 9시 50분. 내 풀세트 꾸밈은 1시간도 안 돼 끝났다. 이제 뭐 하지? 시간 되게 안 가네. 침대에 누워 웹툰을 켰다. 몇 편 봤더니 금세 나갈 시간이 되었다. 미리 골라놓은 귀여운 보라색 니트에 깜찍한 스팽글 스커트를 입고 위에 카키색 패딩을 입었다. 완료. 이제 나가자.
을지로3가에서 제비꽃을 기다렸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두 손 무겁게는 아니어도, 한 손에는 뭔가 들고 올 줄 알았다. 빈손이네?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대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흔한 꽃 한 송이 없었다.
"류미 씨, 미안해요. 생각보다 늦었네요. 버스를 하나 놓쳤는데 배차 간격이 길어서 오래 걸렸어요."
"괜찮아요. 매번 서울 와주는 것만 해도 고맙죠."
나는 그의 팔짱을 꼈다.
"제비꽃,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맛있는 거 먹어요?"
"그러게요. 류미 씨 먹고 싶은 거 있어요?"
크리스마스인데 음식점을 예약 안 했나? 오늘 웬만한 식당은 자리 없을 텐데?
"아뇨 없어요. 제비꽃은요?"
"저도 딱히 없네요. 뭐 먹지."
크리스마스 데이트인데 음식점 예약도 안 하고, 만나는 순간까지 뭐 먹을지 정하지도 않았네. 갑자기 기분이 다운됐다. 나는 오늘 이력서도 다 못 쓰고 일찍부터 서둘렀는데, 남자친구가 아무 준비 없이 오는 게 어딨어?
근처 이탈리아 식당 몇 군데를 들어가 봤지만 웨이팅이 너무 길었다. 다른 괜찮은 음식점들도 만석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무것도 안 먹은 탓에 배고파서 현기증이 났다.
"아 모르겠다, 아무데나 가요 그냥."
"그럼 저기 갈래요?"
제비꽃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보았다.
<명동원조남산왕돈까스>
"...돈까스요?"
"저기 나름 맛집이에요. 엄청 유명해요."
아니... 크리스마스에 왕돈까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제비꽃의 손에 이끌려 돈까스집에 들어갔다.
크리스마스가 돈까스 먹는 날입니까? 웨이팅이 상상초월이었다. 1층은 만석이고, 2층도 만석이라 2층 가는 계단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우리는 줄 맨 뒤에 서서 난간을 붙잡고 사람들이 돈까스를 썰어 입에 넣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우리가 먹을 땐 다른 사람들도 우릴 빤히 쳐다보겠지? 빨리 먹으라고 눈에서 광선 쏘면서.
크리스마스에 돈까스... 그것도 남산명동원조왕돈까스... 아니지 명동원조남산왕돈까스를 먹게 될 줄이야.
30분쯤 기다려 자리가 났다. 앉자마자 미리 주문한 거대한 돈까스 2접시가 테이블에 탁탁 놓였다. 내가 좋아하는 크림수프도 나왔다. 평소였다면 신이 나서 수프를 몇 번 리필해서 먹었을 텐데, 너무 시끄러워서 빨리 먹고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왕돈까스는, 맛있었다. 크리스마스라고 미각이 바뀔 리 없으니.
"류미 씨, 우리 커피 마시러 갈래요?"
"좋아요."
제비꽃과 근처 커피빈에 들어갔다. 우리는 구석에 앉아 커피를 시켜놓고 꽁냥댔다. 제비꽃은 늘 그러듯 바로 옆자리에 앉아 한 손은 내 어깨를 감싸고 한 손은 내 손을 잡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제비꽃의 옷차림에 자꾸 눈이 갔다. 이 강추위에 자켓스러운 코트를 입고 나왔다. 멋 부리려고 패딩을 안 입은 것 같은데, 추울 때 추워 보이는 옷을 입으면 촌스럽다. 안에는 하얗고 빨강 무늬가 교차된 스웨터를 입었다. 나름 크리스마스 에디션으로 신경쓴 것 같은데, 오래됐는지 여기저기 보풀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가을 웜톤 사람인데 윈터 쿨톤이나 소화 가능한 쨍한 빨강+하양 스웨터를 입으니 얼굴이 더 검어보였다.
하지만 옷차림이 뭐가 중요해. 내면이 중요하지. 제비꽃은 맑은 영혼의 소유자니까, 전부 용서된다.
"혹시... 류미?"
뒤에서 누가 날 조심스레 불렀다.
"어머, 세나 언니! 웬일이야!"
나는 벌떡 일어나 언니와 손을 맞잡았다. 첫 회사 동기 언니였다. 예뻐서 회사에서 인기 짱이었던 세나 언니. 30살도 안 돼서 결혼했는데, 결혼식 전날 밤에 남자 직원들이 전화해서 아쉽다고 꼬장을 부릴 만큼 예뻤다. 그녀는 잘생긴 부잣집 남자랑 결혼해서 캐나다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서울에 있지?
"이게 얼마만이야~"
"그러니까! 언니 근데 캐나다에 살지 않아?"
"어 맞아. 애들 방학이라 잠깐 들어왔어."
뒤를 보니 세나 언니를 닮아 예쁘고 잘생긴 딸과 아들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내게 꾸벅 인사했다. 예의도 바르네. 아이들 옆에는 세나 언니 남편이 있었다. 키 크고 잘생긴 외모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했다. 옷도 무채색 골프웨어에 패딩 차림이었다. 고급스러워 보였다.
"언니, 여긴 내 남자친구 제비꽃이야."
"안녕하세요 류미 남자친구입니다."
"아아 안녕하세요!"
고개를 돌려 제비꽃을 봤다. 창문에서 햇빛이 들어와 그의 정수리가 더 훤해 보였고, 얼굴도 한층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세나 언니 남편의 고급진 골프웨어와 그의 보풀진 하양+빨강 스웨터가 비교되었다. 그의 환한 미소가 문득 낡아 보였다.
"류미야 그럼 놀다 가. 난 신랑이랑 애들이랑 성당 가야 해서 먼저 갈게."
"응 언니 잘 가."
언니가 남편과 애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잠깐. 세나 언니가 불렀을 때 우리는 몸을 착 붙이고 꽁냥대고 있었다. 언니가 나가는 길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우릴 계속 지켜보았을 가능성도 컸다. 우리가 볼 부비고 뽀뽀 쪽쪽 하는 것도 다 봤겠네. 세나 언니가 '류미 쟨 나이 들어서도 저러고 있네. 그렇게 재고 따지더니 결혼도 못하고’라고 생각했으면 어쩌지?
내 마음을 모르는 제비꽃은 내 손을 잡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에서 슬며시 손을 뺐다.
“왜 그래요 류미 씨?”
“아니에요. 그냥 좀 더워서요.”
제비꽃의 얼굴에 침울한 표정이 떠올랐다. 제비꽃의 잘못은 없었다. 그저... 내가 못나 보였다. 크리스마스에 근사한 음식도 아닌 왕돈까스 먹고, 다 늙어서 결혼도 못하고 카페에서 애들처럼 꽁냥대기나 하고.
참, 크리스마스 선물도 못 받았다.
제비꽃이 말했다.
“우리 나가요 류미 씨.”
“어딜요. 우리 갈 데도 없잖아요. 아무 데도 예약 안 해서.”
“일단 나가요.”
제비꽃은 내 손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명동 거리에 사람이 더 많아져 있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따라와 보면 알아요."
인파를 헤치고 걸어서 도착한 곳은 명동성당이었다. 크리스마스에 명동성당이라니, 너무 뻔한 거 아냐? 하지만 나는 그 뻔한 명동성당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냉담하고 있지만 나름 세례도 받은 가톨릭 신자인데.
"나는 류미 씨랑 크리스마스에 여기 꼭 함께 오고 싶었어요. 나한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에요."
"왜요? 어떤 의미인데요?"
'혹시 구여친이랑 매년 크리스마스에 와서 그런 거 아니에요?'
물론 속으로 말했다.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요. 그리고 류미 씨, 패딩 주머니 한번 봐봐요."
응? 뭐가 들어 있나?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 실제로 몰랐으나 더더 오바해서 - 주머니를 뒤졌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뭔가가 만져졌다. 꺼내보니 작은 상자였다. 안에는 반짝반짝한 묵주반지가 들어 있었다.
"묵주 반지네? 와 딱 맞아요.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요?"
"맨날 손 잡고 다니면서 어느 정도인가 가늠해봤죠. 그래도 확실하진 않으니까 파는 사람한테 물어봤는데, 사이즈는 나중에도 조정할 수 있대요."
"너무 고마워요 제비꽃. 앞으로 늘 끼고 다닐게요."
"그래요. 류미 씨가 좋아하는 모습 보니까 나도 행복해요."
나는 제비꽃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가요 류미 씨."
"뭐 먹을까요? 저녁은 제가 살게요."
"미리 예약해둔 곳이 있어요. 식사권도 사놨고요."
"정말요? 사실 제비꽃이 오늘 아무 준비 없이 나온 줄 알고 쬐금 서운할랑말랑 했는데..."
"쬐금이 아니라 많이 서운해하고 있던 거 알아요. 놀래켜주려고 미리 말 안 했어요. 이제 밥 먹으러 가요."
나는 왼쪽 검지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끼고, 오른손은 제비꽃의 손을 깎지 꼈다.
"얼른 가요!"
저녁이 다 되어 부드러워진 햇볕이 얼굴에 닿아 따뜻했다. 우리는 손을 꼭 붙잡고 인파 속으로 걸어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