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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 Aug 25. 2020

목이 말라서 우물을 파 보았다

나의 지금을 이루는 모든 시작 #1 요리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영혼에 새겨 둔다.’ 음식에 대한 나의 집착을 두고 친구들은 말하곤 한다. 그 말 그대로, 나는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그것을 내 입에 넣을 때까지 몇 날 며칠을 그 생각에만 사로잡힌다. 평소에도 식욕이 들끓는다거나 혼자서 2-3인분을 먹는 대식가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게 먹더라도 끼니는 정해진 시간에 먹어야 하고, 맛과 건강 어느 하나도 챙기지 못한 음식으로 소중한 한 끼를 때우는 것을 싫어하며, 소중한 사람과는 맛있는 걸 먹고 싶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러한 나의 기준을 충족하는 맛집은 대개 비싸거나 멀리 있기 마련인데, 나는 학생이고 집순이라는 사실이다.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저 멀리 연남동이나 가로수길 대신 집 앞 마트로 향한다. 유튜브와 블로그에서 찾은 레시피를 들고.


본래부터 요리하기를 즐겼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생 때, 조리학과를 목표로 한다며 매일같이 자신이 만든 요리를 학교에 챙겨 오던 친구를 보면서도 요리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았던 적은 없었다. 배달 서비스가 이만큼 발달한 나라에서 비지땀 흘려가며 불 앞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좀 더 열렬히 변명해 보자면, 수험생 땐 공부하느라 바빴고 대학생이 된 후엔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엄마가 식사 준비하시는 걸 돕기는 했지만 내 몫의 일거리들은 요리라기보단 단순노동에 가까웠다. 마늘 까고, 계란 깨고, 참치 캔 뚜껑 따는 일을 요리라고 칭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20년이 넘도록 가스레인지 불꽃, 두툼한 생고기, 흙 묻은 감자 같은 것들과 낯을 가렸다.


음식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지닌 나 같은 사람이 요리를 시작하는 계기는 매우 단순하기 마련이다. ‘필요’. 좋게 말해야 ‘필요’고 나쁘게 말하면 ‘궁함’이 될 터다.


때는 바야흐로 2016년, 운 좋게도 반년 간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행선지는 영국 런던.


해외에 장기간 체류하는 것이 처음이었던 나는, ‘한식에 대한 그리움’을 상당히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김치를 좋아하지 않았고, 국이나 찌개도 부러 찾아 먹진 않는 편이었고, 라면과 떡볶이 같은 분식도 즐겨 먹지 않는 나였기에 가끔씩 한식당에나 가면 되겠거니 생각할 따름이었다. 전에 런던에 여행을 와본 적이 있던 나는, 런던 센트럴에는 한식당이 적지 않을뿐더러 한식 체인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영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맹렬하게 ‘매콤한 국물이 먹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어학원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들이 나를 어학원 근처의 한식당에 데려가 주었다. 내가 시킨 메뉴는 순두부찌개.



순두부찌개의 맛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던 맛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연하지만 가격도 비쌌다. 빵, 샌드위치, 햄버거에 물릴 대로 물렸던 나는 그제야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매 끼니 한식을 사 먹을 수는 없다. 런던의 한식당들이 내 취향의 찌개를 끓여주길 바라서는 안 된다. 먹고 싶다면, 내가 직접 만들어야 한다.






2014년, 전문 셰프들이 요리 배틀을 펼치는 JTBC의 <냉장고를 부탁해>를 필두로 요리 예능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자취생들에게 단연 큰 도움이 되었던 방송은 백종원의 첫 고정 예능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 (MBC)>이었다. “요리는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푸근하게 웃어 보이는 백종원의 등장. “인터넷에 ‘먹고 싶은 메뉴 + 백종원 레시피’만 검색하면 된다”는 말이 자취생들을 부엌으로 이끌었다. ‘요알못’이 요리를 시작하기에 적격인 시기였다.


내 첫 요리는 친구네 집에서 친구와 함께 해 먹은 라볶이였다. 사실 친구가 거의 다 하고 나는 보조만 하는 수준이었지만, ‘직접 다듬고 조리해 먹는 일’의 재미를 깨닫기에는 충분했다.


친구들과 만들어 먹은 라볶이, 어묵부침.


라볶이는 내가 기대했던 그 맛이었다. 떡보다 어묵을 더 선호하는 내 취향대로 어묵을 많이 넣을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남은 어묵을 계란에 부쳐 구운 것도 맛있었다. 친구들과 깔깔 웃으며 만드는 과정도, 먹고 나서 함께 배를 두드리며 정리하는 과정마저도 재미있었다.


우리 플랫(flat)의 부엌에 짐이 늘어났다. 한인마트에서 산 간장, 고추장, 참기름, 참깨가 찬장을 채웠다. 냉장고엔 계란과 치즈, 파, 양파, 김치가 자리를 잡았다. 집 근처에는 걸어서 40분 거리에 한인마트가 두 군데나 있었으며 웬만한 식재료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한인 플랫이었기에 한식 냄새가 눈치 보이지도 않아,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해 먹었다.



좋아하는 알감자와 옥수수를 잔뜩 넣어 카레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플랫 메이트들과 한 잔 하며 안주로 어묵탕과 계란말이,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고,



유부초밥을 싸서 근처 공원에 가 한가로이 점심을 먹기도 했으며,



어려울 줄만 알았던 닭볶음탕도,



두부김치도,



지금은 가장 자신 있는 요리인 김치볶음밥도 척척 해 먹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트에서 생 소갈비를 사 와 뼈와 고기를 분리한 후 고기는 양념하여 굽고 뼈로는 소고기 뭇국을 끓이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열의였다. 재미와 자신이 동시에 붙으니 못할 게 없었다.


확실히, 이때쯤 나에게 요리는 단순한 ‘생존 스킬’ 그 이상이었다. 무료한 유학 생활을 달래주며 향수까지 채워주는 궁극의 의식(儀式). 요리를 시작한 덕에 첫 타지 생활의 외로움을 무던히 버텨낼 수 있었음은 틀림없다.






귀국 후에는 한식보다도 파스타를 자주 해 먹었다. 한번 해 보니 파스타만큼 쉬운 게 없었다. 런던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파스타’ 하면 무척 어렵고 까다로운 음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녹차 초콜릿 쿠키의 맛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생애 첫 베이킹에 도전할 때마저도 나는 거침없었다. 이제는 TV나 인터넷을 보다가 먹어보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근처 식당이나 배달 어플보다는 레시피를 먼저 검색해 본다.


흔히 ‘시작이 반이다’라고들 한다. 나에게는 요리가 딱 그렇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듯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나로 하여금 ‘못할 건 없다’라는 자신감을 갖게 만들었다. 물론 여느 요리 유튜버나 블로거들처럼 실력이 뛰어나지도 않고, 남의 레시피를 따라 하기만 할 뿐이라 생업에 보탬이 되지는 않는다. 먹고 싶은 메뉴가 생겼을 때만 반짝 의욕이 생길 뿐이니 취미생활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어색한 감이 있다.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지만 가끔은 사 먹는 것보다 더 낭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는 조금 더 용감해졌다는 것. 나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알게 되었다는 것.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거 내가 해줄게’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늘었다는 것. 어떤 시작은 그처럼 소소한 결과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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