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상상화(2)

사라지면 돌아올 수 없는 것

by 이소현

채린이가 팔짱을 끼고 복도에 걸린 그림들을 둘러봅니다. 근데 왜 걔 그림은 없어? 채린이 말대로 준희의 그림은 보이지 않습니다. 으하하, 교장실에 있어, 으하하. 시도 때도 없이 웃는다고 담임 선생님께 핀잔을 듣는 오지연이가 불쑥 끼어드네요.

6학년이 되어 교장실을 청소할 수 있거나 경시대회에 나가 상을 탄 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그곳에 머리는 좋지만 눈치가 없는 오지연이가 다녀왔나 봅니다. 오지연 말에 따르면, 준희의 그림은 소나무가 있는 어떤 집이라고 하네요. 으하, 근데 교장 선생님 손에 털이 너무 많은거야, 으하하. 악수해야 하는데 너무 웃긴 거야. 푸하하. 간만에 오지연의 이야기를 들어주려 했더니만 준희 이야기하다가 교장 선생님 이야기는 왜 하는걸까요. 김이 팍 샙니다.

“하여튼. 대상 그림은 죄다 교장실에 있지. 그렇게 좋은 그림이면 학생들도 다 같이 봐야 하는 거 아냐? 아니면 걔가 음악 선생님 조카라서, 대상 준 거 아냐? 과학 그림인데 평범한 집 그림에 왜 대상을 줘? 안 그래?”

심통이 나서 눈썹이 잔뜩 올라간 채린이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습니다. 어째, 아무 상을 못 받아서 화가 난 것 같은데요, 오늘만큼은 오지연이가 과학 경진대회에 나간 이야기를 안 꺼내기를 간절히 바라야겠습니다. 그런데요, 채린이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준희는 분명 멋진 그림을 그렸을 겁니다. 그 아이의 편을 드는 건 아니고요, 아무튼, 이건 분명합니다.

“이 그림도 저-어 그림도 다 미술학원에서 그려준 거잖아. 문제다, 문제야.”

작년에도 까만 우주에 행성이 마을처럼 모여 있고,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가득한 미래도시 그림을 보았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였군요. 역시 채린이는 모르는 것이 없는 아이입니다. 반에서도 매번 손을 번쩍 들고 발표를 하고 토론이라도 하면 상대방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어안이 벙벙해질 때까지 밀어붙이거든요. 이렇게 똑똑한 채린이는 원래 명주가 리더인 ‘칠공주’ 였는데요, 거기서 쫓겨나 은따클럽인 저와 오지연이와 함께 다니는 신세가 되었답니다. 명주네 가족이 미국 여행을 다녀왔나 본데, 미국 부시가 누구인 줄 아느냐, 그렇게까지 찬양할 곳은 못 된다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네요. 저에게도 미국과 우리나라의 관계에 대해 어려운 대화를 시도할까봐 입은 다물고 눈은 크게 뜬 채로 잘 들어주었습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은따와 클럽이 어떻게 함께 묶일 수 있느냐고 하겠는데요, 그렇다면 저도 칠공주였다는 것부터 밝혀야겠군요. 공주가 될 생각도 별로 없었지만, 같은 반이 된 명주가 저를 자기 무리에 끼워주었습니다. 이번에 너희 반에 이유진 있지? 천수 약국 딸이라던데 친하게 지내. 아마 부모님의 그런 입김이 있었던 건 아닐까요? 아무튼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제가 약사의 딸이라기엔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았나 봅니다. 하긴 칠공주라면 모름지기 학교가 끝난 뒤 모여서 춤 연습도 하고 롯데리아도 몰려가야 하는데, 저는 매번 나머지 공부를 해서 갈 수가 없었거든요. 20점짜리 수학 시험지를 갖고 보충반에 가는 저는 공주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혼자 점심을 먹던 어느 날 오지연이가 제 어깨를 두드리더니 이렇게 묻더군요. 너, 은따야? 으하하. 참나, 우리 반의 대표적인 은따인 오지연이가,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하다니요. 네가 따잖아! 그렇게 소리 지르려다 관뒀습니다. 아빠가 그러는데요, 오지연이네 엄마가 약국에 올 때마다 박카스도 아니고 비타 500을 사 간다고 하네요. 어쩌겠습니까, 주먹을 꽉 쥐고 입을 앙다물 수밖에.

교실로 돌아와 책상 서랍에 손을 쑥 넣어서 쪽지를 찾습니다. 왜 숨겨야 하는 일인지 정확히 설명은 못하겠는데요, 어쩐지 들키면 안 되는 일이 최근에 자꾸 벌어지고 있습니다. 엄마에게조차도 말하지 못했다니까요. 손에 잡힌 쪽지는 준희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는 며칠 전부터 편지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날 왜 울었어? 그것이 첫 쪽지였습니다. 수학 점수가 꼴찌여서 반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 때문에 운 날이었는지, 피구하다가 얼굴에 공을 맞아서 운 날이었는지, 도서관에서 혼자 <숙영낭자전>을 읽다가 운 날이었는지, 찔찔이에게 ‘그날’은 수많은 날이지만요, 누군가 나의 눈물을 보고 있었다는 게 또 눈물이 났습니다. 게다가 나머지 공부를 하고 집으로 가고 있으면 어느새 자전거를 탄 준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요, 준희는 참 이상합니다. 편지에서는 말도 많은 아이가요, 마주치면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러고는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지나갑니다. 아무래도 제가 은따라서 말을 섞기는 불편한 거겠죠.

매번 그렇게 준희의 자전거를 눈으로 좇아가면요,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힘차게 페달을 밟아 그 집으로 가겠죠? 충대 병원 근처, 화원들 뒤편으로 보이는 고고한 이층집 말이에요. 왜인지 그 아이라면, 그런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그런 곳에 살 것만 같거든요. 물론 저는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어른들이 그 동네에 철거될 집이 많아서 절대 그 골목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거든요. 그래서 요즘 저는 그 아이의 집을 상상해봅니다. 혹시나 그 집 마당에도 소나무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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