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유전의 법칙
“이게 뭐야. 토성이 왜 이래? 너 명암 넣을 줄도 모르냐?”
옆자리 호진이의 통통한 손 위로 크레파스를 주욱 그어버릴까보다 생각했지만, 이내 그만두었습니다. 그 아이가 저를 밀치기라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슝 날아가 교실 코너에 처박혔을 겁니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토성이야.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종이를 앞으로 쭉 내밀었습니다. 앞자리에 앉은 준희는 저와 저의 토성을 번갈아 보더니 웃습니다. 선생님은 왜 자꾸 이런 걸 시키는 걸까요? 친구들과 모둠을 이뤄 앉는 일도, 함께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일도, 같이 학급 게시판을 꾸미는 일도 귀찮습니다.
준희는 제 그림을 가져가더니 열심히 색칠합니다. 금방이라도 토성이 팽팽 돌아갈 것 같습니다. 어느새 아이들이 모여들어 그 아이의 그림을 구경합니다. 준희는 복도 많은 아이입니다. 엄마가 그러기를 저 아이가 사는 동네가 집성촌인데, 대대로 유명한 학자를 배출했고요, 특히 예술가 집안이라네요. 가족 모두가 음악도 하고 미술도 하고 서예도 한다네요. 그래서 쟤네 고모는 우리 학교 음악 선생님이에요. 와, 고모가 음악을 한다니 부러워 미치겠습니다.
학교가 끝나고 아빠 가게로 가서 매대 앞 의자에 앉아 상자를 뒷발로 툭툭 칩니다. 상자를 찰 때마다 발은 더 크게 앞으로 튕겨 나갑니다. 그만해라-. 컴퓨터 앞에 앉은 아빠가 저를 노려봅니다. 3초간의 정적. 다시 발로 상자를 치자 아빠가 던진 볼펜이 제 이마를 때립니다. 아이씨. 그러게 왜 노래를 그만두게 했냐고요, 글쎄! 친구들은 학교 합창단 오디션을 보러 음악실로 몰려갈 때 저는 여기로 와야 했습니다. 이제 음악과는 담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 딸이 성악을 하고 싶다네요. 어휴, 안 돼요, 안돼. 애들 예술시키면 집도 팔아야 해요. 둘째도 있잖아. 이것이 사임당 논술학원 선생님과의 대화였다는군요. 그 선생님이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어렸을 때 열두 번도 넘게 이사를 했다는 아빠에게 집은 전부입니다. 그걸 팔아넘긴다니요.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요. 또 동생을 낳아달라고 한 것도 저인데 어쩌겠어요. 마음에서 뭔가가 울컥울컥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랍니다.
아빠가 학원 숙제를 다 했냐고 묻습니다. 말도 하기 귀찮은데 그런 건 왜 묻는지. 대답해. 아빠는 이상합니다. 말하면 말대꾸한다고 뭐라 하고, 말을 안 하면 말을 안 한다고 뭐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되는데 뭐가 어렵냐는 겁니다. 세상에나. 저에게도 의견이라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다 안 했는데요. 그러자 아빠가 또 볼펜을 던져 제 이마를 명중시킵니다. 너 나가서 땅 파봐. 백 원이 나오냐, 십 원이 나오냐. 내가 박카스 팔아서 얼마나 떨어지는 줄이나 알아? 나는 학원을 보내달라고, 보내달라고 해도 안 보내줬어. 알아? 학원을 보내줘도…… 이러다가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것 같아 가게를 뛰쳐나옵니다. 저 새끼가 내 말도 안 끝났는데! 그런 외침이 들리는 것도 같지만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아빠는 가게를 두고 아무 데도 못 가니 쫓아올 일도 없습니다. 유진이 학교 다녀오냐. 김밥천국 아주머니가 나와서 인사를 하십니다. 유진이 집에 가냐. 가게 앞을 쓸던 대농마트 아저씨가 말을 겁니다. 고개를 숙이고 끄덕끄덕만 했습니다. 말하면 눈물이 쏟아질지도 모르거든요.
평소였으면 이 가게, 저 가게 들리며 인사를 했을 겁니다. 그게 제 일이거든요. 미용실에 올라가서 미용사 아주머니가 롤 마는 것도 구경하고, 슈퍼마켓에서 아저씨가 물건 나르는 것도 보고, 사진관 아저씨가 사진 자르는 것도 본답니다. 물론 병원은 빼고요. 원래는 자주 놀러 갔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의대만 보내줬어도 내가 그 자식한테 무시는 안 당했어. 아빠는 밤마다 이런 한탄을 하는데요, 의사 아저씨가 무엇인가를 잘못한 모양인가 봅니다. 야, 인마,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의사해, 의사! 맨날 그 바보상자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아빠는 스트레스라는 것을 받아서 저를 꼭 의사로 만들고야 말겠다네요. 참말로 답답할 지경입니다. 제 인사를 받지 못하는 유일한 상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무슨 복수가 더 필요하냔 말이에요.
발에 걸리는 모든 것을 툭툭 차며 걷는데, 뒤에서 자전거 벨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준희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 아이 앞에서는 왜 고개가 숙여질까요? 차마 다가갈 수 없는 존재라서일까요? 그 아이는 마음이 재벌인 곳에서 태어났잖아요.
“고모가 너 찾던데. 내일 음악실 가 봐.”
준희가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 한마디만 남기고 언덕을 쌩하고 내려가 대답은 하지도 못했지만요. 심장이 콩닥거립니다. 말을 걸어주어서인지, 선생님이 저를 불러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빠에게 맞은 곳은 이제 하나도 아프지 않네요.
집에 가니 할머니가 또 밀가루를 개고 있습니다. 금천동 할머니는 제가 성악을 그만두자 매우 슬퍼했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니까요. 웬만한 카수보다 유진이가 나은데 그걸 왜 못 하게 하느냐며 엄마의 등 뒤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빠가 큰집 사야 해서 나 성악하면 안 된대, 할머니. 어쩌면 할머니가 하는 말은 들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신 할머니는 더 많이, 더 자주 밀가루를 개어서 만두도 빚고, 칼국수도 만들고, 호박전도 부쳐서 아빠에게 가져다줍니다. 이런!
갠 밀가루 위에 부추를 투하하는 할머니 옆에 앉아서 아빠의 박카스 타령을 들려줍니다. 할머니는 제가 아빠를 따라 할 때마다 웃겨 죽겠답니다. 오오, 버르장머리 없다고 하지 마세요. 할머니는 진짜 ‘웃겨 죽겠다야-’ 이렇게 말한다니까요.
“네 아빠는 마음이 간장 종지만도 못해서 큰 집도 못 산다야. 어데, 궁궐에 살아도 거가 궐인지도 모르는데.”
그러면서 또 부추전을 담아서 저에게 건넵니다. 할머니는 어쩌면 아빠가 자기 마음에다가 찍어 먹으라고 매일같이 만드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걸 아빠가 알아들을 리 만무한데 말이에요.
“아, 진짜 가기 싫-다.”
“어여 후딱 갔다 와.”
우리 집 창틀과 약국의 간판을 줄로 이어 걸어두면 좋을 텐데요. 제 이마도, 제 마음도 무사할 수 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