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수가 처음으로 전국투어콘서트를 시작했다. 옙~!
전국투어라고 해도 여전히 먼 광역시 위주. 공연 보기 위해 서울 가는 것을 미국 가는 것만큼이나 멀게 느끼던 나였지만 더 이상 거리 탓만 하면서 기다릴 순 없었다. 가수도 지방 팬들 보러 먼 곳까지 오겠다는데 나도 맞이하러 가야지. 시간도 되고 티켓값도 있고 같이 갈 일행(남편)도 있는데 다만 문제는 피켓팅이라 불리는 티켓팅이었다. 서울에서는 1분 컷, 5분 컷 말들이 있었는데 지방도 그러려나? 내 주변에서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 사람을 한 명도 못 봤는데 과연 서울만큼 치열할까?
관심이 없었을 뿐 이미 시대는 변해 있었다. 인터넷에 콘서트 티켓 예매 방법을 묻자 광속으로 사라지는 티켓을 잡기 위한 온갖 노하우들이 쏟아졌다. 예매사이트의 초단위 타이머를 알려 주는 사이트도 있고 티켓팅을 연습해 보는 곳도 있었다. 점점 불안해지는데?
그래도 컴퓨터 좀 안다 싶은 선생님에게 팁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이안이한테 해달라고 하세요. 요즘 애들이 샘보다 더 잘할걸요?"
이안이? 지금 방학이라고 집에서 침대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이안이는 게임이나 잘하지 인터넷으로 뭘 구매하거나 예약해 본 적이 없는 앤데?"
이안이는 이제 막 만 14세가 되어 어디 회원가입만 혼자 겨우 할 수 있는 애다. 버스 카드도 내가 만들어줬고 시내버스도 최근에 혼자 타본 애다. 문화상품권으로 게임 머니 충전하는 것도 내가 가르쳐줬고 전자레인지에 음식 데울 때도 전화로 꼭 물어보고 하는 애다. 팁이 팁이 아닌 것 같은데. 그것 말고 더 없어?
티켓팅이 다가올수록 나는 최선을 다해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공연장 정보를 검색하여 어떤 자리가 좋고 어떤 자리가 피해야 할 자린지, 거리는 어떻게 되고 주차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른 공연들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등을 면밀히 살펴보고 우선적으로 공략할 자리들의 순위를 매기기 시작했다. 만 원 차이 밖에 안 나는 2층은 절대 절대 걸리면 안 된다! 객석으로 자주 출몰하는 가수이니 되도록 통로 쪽 자리를 잡아야 한다! 클릭 한 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카드결제는 오류가 자주 나니 무조건 무통장입금이다! 아자아자 파이팅!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다행히 전담수업이 있어 아이들도 없다. 나는 점심시간을 포기하고 교실로 와서 다른 콘서트 예매 창에 들어가 연습을 했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안이에게 전화를 했다.
"일어났어?"
"눼."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있지? 콘서트 티켓."
"콘서트 뭐요?"
그럼 그렇지.. 내가 바랄 걸 바라야지. 이 놈은 별로 관심이 없다. 그래도 전화 한 김에 말이나 해보자.
"일단 ** 사이트 회원 가입하고 00가수 00지역 콘서트 예매하는 거야. 2시 시작이야."
"눼."
"결제창 나오면 무통장 입금 눌러. 그럼 오늘 안에 입금하면 돼."
"눼."
2시가 되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리는데... 보안문자를 잘못 넣었단다. 뭣이? 꼼꼼히 눌렀는데. 어쨌든 한번 절뚝거렸지만 초인적인 스피드로 접속했는데 이미 1층 자리의 3분의 2는 사라지고 없다. 헉! 지금 내가 뭘 본거야? 우선순위고 뭐고 없다. 남아 있는 자리 마구 눌렀는데 누를 때마다 '이미 선점된 자리입니다' 메시지가 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리가 반씩 더 사라졌다. 결국 나는 2층 자리도 못 잡았다. 시계를 보니 2시 1분. 허탈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보다. 헬륨 풍선이 닿을 듯 닿을 듯하면서 황망히 하늘로 사라져 버리듯 눈앞에서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아, 진짜 이 무슨.....
그때 문자가 왔다.
'엄마, 자리를 잡긴 잡았는데 좀 뒤쪽이에요.'
이안이가 자신이 잡은 자리를 찍어 보내왔다. 뭐야, 이 녀석. 시간 맞춰서 들어갔던 거야? 자리를 잡았다고? 나보다 낫네. 하지만... 2층이다. 2층에서도 뒤쪽이다. 좋아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이래서 피켓팅이라고 하는구나. 임영웅이나 요즘 뜨는 트롯 가수들 보러 간 사람들 보면 대부분 나보다 더 나이 많은 분들 많은데 그분들 중 티켓을 직접 구입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터넷 후기를 보면 재주 많은 조카, 손주, 혹은 그 나이 또래의 티켓팅 전문 알바들이 구해 준 것들이다. 그렇지 않고서 초초광속인 티켓팅 전쟁을 어르신들이 어떻게 뚫고 왔겠는가.
2시간을 달려가서 2층이라도 앉아야 할지, 그냥 포기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나는 다른 도시에 다시 도전해 보기로 했다. 도저히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다음 티켓은 4시에 열린다. 나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고 이안이에게도 한번 더 애써 줄 것을 부탁했다.
3시 58분 몇 초.. 초긴장 상태로 준비하고 있는데 이안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뭐 하라고요?"
헐.. 그럼 그렇지. 나는 기대를 더 내려놨다.
"4시 00공연. 빨리 끊어."
아까보다 더 미친 듯이 티켓 구입창을 열었으나 이번 공연은 아까보다 더 심했다. 실수 없이 들어왔는데도 티켓은 또다시 눈앞에서 다 사라져 갔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렇게 허탈한 적이 없었다. 또 문자가 왔다.
'좀 지림'
이어서 1층 중앙 앞쪽에 좌석 두 개가 찍힌 사진이 왔다. 이 녀석이 결국 일을 냈다. 일단 계좌이체를 신속하게 한 뒤 나의 영웅에게 전화를 했다.
"야, 이 미친놈.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머어머 나 좀 봐. 너무 좋으니까 욕이 막 나온다. 나 교사인데... ㅎㅎㅎ
"엄마, 내가 해보니까요, 욕심을 버려야 되더라고요. 앞자리부터 찍으면 안 되고..."
욕심 안 낸 자리치고는 너무 좋은 자리였다. 나는 나에게 이 귀한 팁을 알려준 선생님에게 가서 자랑을 했다.
"거 봐요. 샘은 안되고 이안이는 해낼 줄 알았다니까요."
저녁에 남편과 오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좋긴 한데 기분이 좀 이상해."
그러자 나도 모르는 내 기분을 남편이 해석해 주었다.
"이안이가 자기보다 잘하는 게 이상하지? 항상 우리가 도움을 줘야 했는데 이제 이안이 도움을 받으니까."
그렇구나. 좋기도 하면서 뭔가 싸한 이 기분, 미묘하면서 허전하면서 몽글몽글한 이 기분. 이 기분의 정체가 그거였구나. 아이와 나의 역할이 바뀌어가는 어느 시점에 서 있는 느낌. 도움이 필요한 아이에서 도움을 주는 나이가 된 아들, 내가 아들의 보호자였는데 조금씩 아들이 내 보호자가 되어간다는 느낌.
남편은 벌써 이 기분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아빠가 줄넘기를 가르쳐 줬는데 이제 이안이가 아빠보다 훨씬 잘한다. 피파게임도 아빠가 입문시켜줬는데 아빠가 강등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안이가 아빠 이름으로 대신 싸워준다. 그러고 보니 공부도 더 이상 내가 가르쳐주지 못한다. 수학도 이안이가 훨씬 더 잘 푼다.
아이의 성장이 대견하면서도 우리 부모처럼 나도 점점 작아져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한테 더 잘해야겠다. 지금 이 시간들을 가장 잘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아들에게 더더 잘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 없으면 콘서트도 못 가는 나는 특히 아들한테 더 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