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즈음, 퍼머컬처 얼개에서 얻은 배움
퍼머컬처에서 가장자리는 아주 중요한 장소이다. 가장자리는 늘 경계선과 맞닿아 있다. 경계선이라는 것은 새로운 세계와 세계와의 만남의 장소이다. 따라서 가장자리는 늘 이쪽의 것과 저쪽의 것이 함께 공존하며 이쪽과 저쪽에 속하지 않거나 이쪽과 저쪽 모두에 속하기도 하는 새로운 것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가장자리의 정체성은 다양성에 있다. 그리고 자연에서는 이런 다양성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순환고리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매우 다양한 생명이 한 곳에 있지만 저마다 다투거나 밀어내지 않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곳, 그곳이 바로 가장자리 라는 것이다. 자연은 그 진리를 잘 알고 있고, 그 진리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
가장자리는 자연에게만 중요하지 않다. 개인과 공동체의 삶, 사회, 경제와 같은 영역에 있어서도 중요한 통찰을 준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삶은 가장자리를 남겨두려 하지 않는다. 가장자리를 불편해 한다.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그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는 모든 것을 낙오시킨다. 자본이라는 거대한 욕망의 깔대기에 필요한 재료만을 집어 넣고 나머지는 쓸모 없는 것으로 버린다. 우리가 일삼고 있는 관행농에도 가장자리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드넓은 땅 위를 하나같이 갈아엎고, 하나의 작물로 덮어 버리고, 그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해 버린다. 우리의 텃밭과 정원도 가장자리가 없음은 마찬가지이다. 눈에 보기 좋고, 아름다운 작물에만 집중할 뿐 그 밖의 자리는 나무판이나 시멘트로 말끔하게 정리해 버린다. 아름다운 울타리를 치고, 보기 좋은 장미덩쿨로 감는 것이 전부이다. 큰 맘 먹고 마련한 전원주택에 살면서 하루종일 하는 일은 말끔하게 깎여진 잔디를 위해 하루종일 잡초를 뽑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건강한 숲은 사람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가장자리가 울창하다. 오히려 그런 숲은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단조롭고 안정되어 있다. 하지만 가장자리를 밀어버리면 숲의 균형은 깨지고 그 균형을 이루기 위해 숲전체가 몸살을 낸다. 숲에 아무도 물을 주지 않고, 아무도 돌보지도 않고, 아무도 살충제를 뿌리지 않아도 병충해가 없고 식물이 메말라 죽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반면, 사람이 만든 텃밭과 농지에는 수없이 땅을 갈아엎고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뿌려대도 그 때뿐이지 해마다 이 일을 반복해야만 하는 것과 비교해보라. 다양성이 파괴되면 균형을 잃게 되고 어떤 방식으로든 이상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균형을 찾는 것. 안정되게 하는 것. 건강하게 만드는 것. 이 모든 것은 가장자리를 없애고 말끔하고 깨끗하게 만들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자리를 보호하고, 가만히 두는 것. 그러면 자연은 그들이 창조된 질서 안에서 스스로 조화를 찾아갈 것이고, 다양성 가운데 안정된다. 이것이 자연의 원리이다.
우리의 과제는 분명하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텃밭과 논밭을 자연이 일하도록 만들고, 동시에 거기에서 나오는 수확물을 얻을 수 있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자연의 원리를 우리의 삶에까지 가져와 접목시킬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통찰과 배움을 우리 사람들이 얻을 수 있게 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보다 건강한 개인과 공동체로 성장할 것인가?
나는 이것 한가지 만은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사람 안의 것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가기 위한 힘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진리가 우리를 이끌어야만 하고, 이끌도록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진리를 직간접적으로, 가장 열린 방식으로, 누구의 강요와 지시가 아니라 자발적 순종으로 이끌기 좋은 곳은 자연이다.
퍼머컬처는 이런 점에서 중요하다. 퍼머컬처는 자연을 돌보고, 이웃을 돌보고, 공정하게 분배하라는 대원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연에서부터 출발하여 개인과 공동체를 아우르고, 나아가 인류와 사회의 구조의 지속가능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기 위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인류가 있기도 전에, 이 세상이 지속가능해 왔던 방식일 뿐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실마리 속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파커파머는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에서 “가르침이란 진리에 순종할만한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나는 가장자리숲에 서서 그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다. 이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가장자리야말로 진리에 순종할만한 공간이다. 그 말할 수 없는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길을 찾는다. 그 말할 수 없는 충돌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열어주는 열쇠이다. 예수님은 중심에서 일하지 않으셨다. 가장자리와 같은 곳에서 하나님 나라 비밀을 선포하셨고 이적과 기적을 보여주셨다. 그 진리를 맛본 사람은 모두 불편함과 충돌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자들이었고, 오직 그들의 순종만이 진리를 맛보는 기회를 얻게 하였다. 하지만 그 불편함과 충돌을 허용할 수 없었던 사람들, 더 본질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우상을 한치도 양보할 수 없었던 이들(바리새인, 서리관, 제사장) 들은 오히려 진리를 배척하고 죽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은 예수 곁에 있던 자들이었다. 목격자는 증언할 수 있다! 수많은 목격자들, 증인들이 증인의 삶으로 걸어갔다. 그 앞에는 칼과 폭력과 배고픔이 있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목격자만이 증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증인들의 삶의 구체성은 무엇인가? 나눔과 섬김이었다.나눔과 섬김은 부활하신 진리를 목격한 증인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그것은 세상의 이치와 원리로는 설명 불가이다. 그것은 미련한 짓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삶이 변방 가장자리에서도 빛이 되었듯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죽음과 죄의 사슬을 끊었듯이, 증인들의 삶은 여전히 세상 속에서 담대하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나는 어떻게 증인의 삶을 살 것인가? 진리를 만나야 한다. 어떻게 진리를 만날 것인가?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 변방으로 나서야 한다. 그곳에 가르침이 있다. 그 가르침이 나를 순종의 길로 이끌 것이다.
2022. 4월 부활절 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