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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럽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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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롱 Aug 13. 2021

첫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정식을 만나다!

따뜻한 한 그릇에 담긴 엄마의 사랑

타지에서 혼자 학기를 보내는 유학생에게 짧은 방학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순간이다. 여름 방학이나 겨울 방학은 기간이 충분히 길어서 한국에 가서 부모님도 만날 수 있고,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셈 치고 인턴쉽이나 봉사 활동도 할 수 있다지만, 일주일 남짓한 부활절 휴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애매하다. 특히 첫 부활절 방학을 특별한 계획 없이 집에서 심심하게 보내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며 집에 있는 것 또한 외로움 증폭장치 같아 피하고 싶다. 두 번째 부활절, 똑같이 허무하게 보낼 수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영 좋은 생각이 떠오르질 않는다. 아이리쉬 친구들은 가족들을 방문하러 본가로 떠났다. 함께 이 시간을 보낼 가족이 내게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같이 가자는 소리 하나 없어 괜히 서운하다. 그만큼 아직 친하지 않다는 뜻인가 내심 생각해보던 차, 갑자기 따뜻한 손길이 등장! 마누엘라에게 연락을 받았다. 연한 갈색의 초록눈을 가진 귀여운 이탈리아 친구. 다른 이탈리아 친구들과 다르게 중저음의 목소리로 사근사근 대화하는 아이. 같은 과목은 하나밖에 없지만, 진짜 이탈리아 피자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하며 집에 초대해준 것을 계기로 친해졌다. 얇은 도우에 두세 가지 토핑만 무심히 휙 올리고 구워내는 피자가 그렇게 맛있는지 처음 알려 주었고, 당근을 싫어하는 내게 양상추와 당근 만으로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샐러드를 뚝딱 만들어서 올리브유의 맛에 눈 뜨이게 해 준 나의 사랑스러운 이탈리아 친구.  


"부활절은 걱정 마. 우리 집에 가자. "

"응? 무슨 소리야. 너네 집 이탈리아잖아. "

"무슨 소리긴 우리 집에 와서 일주일 놀다 가. 피자 먹어봐야지. 엄마 아빠도 다 오라고 하셨어. "


부모님도 허락해주셨다니 초면에 죄송하지만 신세를 지기로 했다. 이탈리아에 한 번도 방문해보지 않은 터라 기대도 되었고, 이 선물은 나중에 한국에서 되갚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첫 이탈리아 여행, 행선지는 베네치아 근처위치한 작은 마을. 마누엘라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고등학생 남동생 빠블로의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모두가 영어를 전혀 못하는 데다 내가 아는 이탈리아어라고는 안녕하세요 (Ciao 챠오) 감사합니다 (Grazie 그라찌에) 뿐이라 솔직히 걱정도 살짝 되었다. 따뜻한 마음만 있으면 손짓 발짓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동네 우체부시고 은행에 다니시는 어머니께서는 특별히 내가 온다고 일주일 휴가까지 내셨다고 하니 솔직히 놀랐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정이 많고 화통해서 한국 사람과 닮은 구석이 많다고 듣기만 들었지, 한국식 모성애를 이곳에서 동일하게 발견할 줄이야! 매 끼니 정성스레 맛있는 식사를 챙겨주시는 것. 멀리서 온 딸의 친구에게 세심하게 돌보아 주시는 이탈리아 부모님께 나는 엄마 아빠의 사랑을 느꼈다.


평소 요리에 관심이 많은 나는 마누 엄마가 해주시는 쿠킹 클래스에 신이 났다. 스파게티로 일축하던 파스타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지도 각각에 어울리는 소스와 재료가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직접 만들어 먹는 피자에 다다익선이라고 이것저것 토핑을 많이 올리던 내게 마누가 "아니야. 틀렸어!"라고 말하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이탈리아 음식의 첫인상은 딱 그랬다. 최상의 엄선된 재료로 본연의 맛을 최대로 끌어내 담는 요리. 파스타를 삶을 때마다 포장지에 적힌 숫자를 손가락으로 콕 집어주시며 이탈리아어로 읽어주신다.


"노베 미누띠또!"


무슨 뜻인지 이탈리아어는 전혀 몰랐지만, 눈치로 딱 9분만 삶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나는 셰프님이 지시하신 것을 암기하듯 똑같이 그 말을 반복했고, 어머니는 기특하다고 등을 토닥토닥하며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푹 퍼진 칼국수 면이 싫은 것처럼 이탈리아 사람들도 시간을 딱 맞추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 아일랜드와 정말 다른 점은 마늘을 많이 쓰는 것이었는데, 소스를 만들 때 칼등으로 툭 마늘을 쪼개 올리브유에 뭉근히 마늘향이 배게 하는 그 일련의 과정이 이국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것은 솔솔 코를 간지럽히는 마늘 향기 덕이 었을 것 같다. 햇살에 푹 익은 토마토의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별 다른 요리 과정은 없었다. 빵을 살짝 구웠고 토마토를 잘게 잘라 정원의 바질 잎을 몇 개 뜯어 찢어 넣고 소금 간을 하고 올리브유를 휘리릭 뿌린 것을 듬뿍 올린 토스트 (부르스케타 bruschetta)는 몇 개고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은 아버지 담당이다. 지하실에 있는 화덕에서 손수 숯불에 고기를 구워 주셨다. 집에 이런 바비큐 장소가 있다니. 그것도 신기했다. 특별한 날에 어김없이 숯불 구이란다. 특별한 손님이 멀리서 왔으니 이걸 꼭 먹여야 한다고 덧붙이시며. 동네 사람 반응으로 봐서는 내가 이곳에 처음 방문한 아시아인이 아닐까 싶었다. 한번 보고 다시 보고 계속 보는 시선을 느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나의 이탈리아 친구에게는 신기한 존재가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부모님께부터 벌써 평범하지 않은 손님이 었던 것 같다. 나를 거의 모든 친척에게 소개했으니 말이다. 나는 양가 조부모님부터 시작해서 친구의 모든 친척 만났다. 이때 아니면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나 싶어 기꺼이 응했다. 친구의 부모님은 한 동네에서 자라 결혼하셨기에 모든 가족들이 근처에 살았다.


가장 먼저 근처에 사시는 할머니 댁부터 방문했다. 특이하게 칠면조를 기르고 계셨고 매년 잡아먹는다는 얘기를 들으니 괜히 섬뜩하기도 했다. 심지어 돼지도 매년 '직접' 잡으신단다! 손수 판체타도(염장한 삼겹살, 베이컨에 가깝다 Pancetta) 살라미(역시 돼지 가공품으로 염장 건조 소시지 Salami)를 자랑스레 보여 주시며 살라미를 얇게 한 장 잘라주신다. 감칠맛이 폭발한다. 주말에는 외할머니 댁에 온 식구가 모였다. 마누의 삼촌과 숙모 귀여운 사촌 동생들까지. 할머니는 80세가 넘으셨다는 데도 아주 정정하셨다. 아주아주 커다란 오발 형태의 접시에 해산물 샐러드(인살라다 푸루티 디마레 Insalata di frutti di mare)를 전식으로 내어주셨다. 평소 해산물 먹을 기회가 거의 없어서 맛있게 먹었다. 재료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손질되어 새우도 오징어도 비린 맛 하나 없이 탱글 탱클 했다. 커다란 테이블에 마주 앉은 가족들을 보니 할머니가 정말 행복하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어진 파스타는 할머니가 손수 만드신 면이라고 했다. 하나를 먹여도 정성스럽게 먹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은 나이가 들어도 없어지지 않는 사랑이다.   


휴가까지 내신 어머니는 우리를 산에도 데려가 주셨다. 4월에도 쨍쨍하고 무더운 이탈리아의 날에 돌로미티(Dolomiti) 산으로의 당일 치기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긴팔을 챙겨 입으라고 하셨는데, 정말 반팔을 입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 날씨에 웬일이냐! 눈이다. 4월의 이탈리아의 알프스, 설산보다 기억에 남는 건  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이었다. 동네 빵집에서 빵을 사고, 햄 전문점에서 모르타델라라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햄을 사셨다. 모르타델라(Mortadella)는 핑크색 햄에 하얀색 돼지 지방과 연둣빛 피스타치오가 콕콕 박혀있는데, 평소 슈퍼에서 사 먹던 햄과 다르게 향긋하고 신선했다. 햄 하나 끼운 빵일 뿐인데, 왜 이렇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지. 세상에 내가 모르는 재료가 가득하고, 아직 맛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설레었다. 게다가 엄마표 아닌가. 어디서 내가 이탈리아 어머니가 직접 싸주시는 도시락을 먹어볼 수 있을까 싶어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또한 감사한 마음이 가득하다.


스페인에서 살게 되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친구들이 있다. 그중 마누엘라를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외로울 때 손을 내밀어준 친구, 피자는 파파존스만 알았던 내게 이탈리아 음식 101편을 알려준 고마운 친구. 이탈리아 가족의 환대를 선물해준 친구. 이탈리아 음식을 맛보고 그때 먹었던 음식 재료를 볼 때 그 친구가 떠오른다. 마누엘라의 가족들과 행복했던 추억까지. 어머니께 배운 대로 파스타를 삶을 때는 눈대중 없이 무조건 시간을 엄수하고, 파스타 생면을 살 때는 어떤 재료가 어울릴지 꼭 검색해본다. 마트 가판대에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토마토를 보면 오늘은 한번 부르스케타를 해볼까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그때의 기억은 그만큼 강렬했나 보다. 미식의 나라 스페인에 왔으니 이제 나도 은혜를 보답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유럽식으로 세 가지 코스를 준비해보고 싶다. 전식으로는  스페인식 문어숙회. 해산물을 좋아하시던 가족들을 생각하니 딱 좋을 것 같다. 삶은 감자에 보들보들하게 쪄낸 문어를 올리고, 스모키 한 향이 근사한 피미엔 톤 가루를 살살 뿌린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 스타일로 준비해야지. 본식은 함께 긁어먹는 재미가 있는 커다란 빠에야 한판을 사 와야겠다. 후식으로 과일과 치즈 플래터를 내고 밤 늦게까지 그 동안 밀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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